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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기 Nov 24. 2022

이 사람을 보라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채찍질 당한 말을 끌어안은 니체는 왜 광기에 사로잡혔나

"데카르트를 용서해줘."(!?)


백과사전에 ‘현학적’이라는 단어의 뜻풀이 예시 문구로 사용되기에 손색없는 이 문장은 니체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기 직전 이탈리아 토리노의 어느 말을 껴안은 채 흐느껴 울던 중얼거림이라고 밀란 쿤데라는 설명한다.


10년 넘도록 지속된 어머니와 여동생의 간병에도 정신병으로 서서히 바스러지던 위대한 철학자 니체가 이 같이 너저분한 텍스트를 목도했더라면, 자신의 주특기이자 별명인 오함마를 꼬나쥐고 영원회귀 속 시간을 거슬러 미래에 사는 쿤데라를 찾아 병상에서 뛰쳐나갔을테다. 기사도 문학에 미쳐 당나귀를 타고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돈키호테처럼. 마상시합에서 맹렬한 기세로 랜서 차지를 하는 위용있는 기사의 시대는 니체 사후 현대로 접어들어 온데 간데 없더라도 말이다.


"1889년 1월 3일, 그날도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는 승객을 기다리는 몇몇 마차들과 택시 사이에 늙은 말들이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서 있었다. 불쌍한 말들은 주인의 명령을 따르느라 속절없이 괴롭힘을 당했다. 니체는 한 마부가 말을 심하게 채찍질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몸을 던지다시피 하여 마부를 가로막았고,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 혹은 그랬다고 전해진다. 극적인 장면은 순간적으로 왔다가 순간적으로 지나간다. 그래서 목격자들이 말하는 진실은 형태가 다양하다." <니체의 삶>


어떤 이는 니체의 광기가 발현한 트리거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찾는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하나님 없는 존재의 삶과 그 가능성을 각종 범죄를 통해 실험하며 죄와 씨름한다. 그러던 중 말에게 채찍질하는 농부들 가운데 죽어버린 말을 끌어안는 꿈을 꾼다. 니체가 <죄와 벌>을 읽은 경험이 무의식에 깃들었나.


광기에 빠진 순간, 스쳐가는 기억의 편린에는 평생에 단 한 번 열렬히 사랑했던 여인 루 살로메도 떠올렸을 것이리라. 니체의 친구인 파울 레와 니체는 루 살로메를 동시에 사랑했고, 그녀도 그들을 한꺼번에 사랑했다. 게다가 이들은 인생네컷에서 사진 찍는 인싸들을 뛰어넘는 설정샷을 당시 사진관에서 찍었는데, 그 장면은 바로 살로메가 두 남자 뒤에서 채찍을 들고 서있는 모습이다.


괴상하고 다정한 기행은 오래가지 않았다. 파울 레는 살로메와 이어지지 못해 괴로워하다 결국 자살하고, 니체는 광인이 된다. “내가 이 시대 제1의 철학자", "나는 지난 천 년과 앞으로 올 천 년 사이 존재하는 결정적이고 운명적 사건” 등 중증 나르시즘으로 가득하나 부정하기도 어려운 어록을 남긴 위인도 운명적 사랑을 함께한 여자 앞에선 한낱 가축이 돼 애정을 갈구한다.


니체는 이성을 상실하는 마지막 순간,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가장 아꼈던 작품인 <백치>를 떠올렸을 지 모른다. 주요 인물인 이폴리트는 페병으로 시한부 통보를 받은 무신론적 허무주의자다. 그는 로고진 집에 걸려있던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를 감상하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게도 고통에 찢긴 이 인간의 시체를 보고 있노라면 매우 특이하고 야릇한 의문이 생겨났다. 만약 그를 신봉하며 추앙했던 모든 제자들과 미래의 사도들, 그리고 그를 따라와 십자가 주변에 서 있었던 여인들이 이 그림 속에 있는 것과 똑같은 그의 시체를 보았다면, 그들은 이 시체를 보면서 어떻게 저 순교자가 부활하리라고 믿을 수 있었을까? 만약 죽음이 이토록 처참하고 자연의 법칙이 이토록 막강하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생전에 자연을 물리치고 예속시켰던 자로서 그가 ‘탈리다 쿰!’이라고 외치면 소녀가 일어났고, ‘라자로야, 이리 오너라’ 하면 죽은 자가 걸어 나왔는데, 그런 자마저 이겨 내지 못했던 자연의 법칙을 우리가 어떻게 극복하겠는가?


(중략)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이 그림 속에서 자연이란, 위대하고 귀중하기 짝이 없는 창조물을 닥치는 대로 포획하여 무감각하게 분쇄시켜 마구 삼켜 버리는 엄청나게 큰 첨단 기계처럼 보인다. 그 창조물은 자연 전체와 비견되고, 자연의 모든 법칙들과도 비견되고, 지구 전체와도 비견되는 것인데 말이다. 사실 지구 자체도 오로지 이 창조물의 탄생을 위해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이 그림에는 모든 것을 예속시키는 어둡고 불손한, 무의미하게 영원한 힘의 개념이 표현되어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에는 단 한 사람도 나타나 있지 않지만, 죽은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었던 추종자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일시에 분쇄된 그날 저녁 무서운 슬픔과 혼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아주 지독한 공포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각자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사상을 안고 돌아갔으리라. 만약 이 스승이 처형 전야에 자신의 모습을 미리 그려볼 수 있었다면 선뜻 십자가에 올라가 지금처럼 죽으려고 했을까?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러한 의문이 저절로 떠오르곤 한다.”


위버맨쉬, 힘에의 의지, 주인의 도덕, 신의 죽음, 현실과 육체의 찬양 등을 주창했던 이 사람은 어느 마부의 채찍에 신음하던 말을 보고 실신할 지경까지 울음을 터뜨린다. 이 사람은 피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광경과 몸을 짓누르는 육중한 안장의 무게로 구성된 야생을 비로소 처음 만난 것이다. 진정으로 현실을 인정하고 오롯이 받아들이면 누구나 미치는 법이다. 니체는 당대의 에피스테메와 이데아를 깨부쉈다. 그러나 광대한 자연에서 핍박 받는 나약한 피조물을 정면으로 마주하자 광인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다.


신의 죽음을 예언한 미치광이의 입술에서 ‘하나님의 어린 ’의 모습이 엿보인다. 그는 정신착란 직후 자신이 ‘십자가에  박힌 라고 종이에 끄적이거나, 무한의 철학자 칸토어처럼 ‘나는 신의 후계자라고 되뇌였다. 회한, 연민, 경외, 수치심, 고통이  사람의 머릿 속을 온통 헤집었을테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렬히 사랑한 여자, 삶의 고통, 무의식에 남은 정겹던 추억, 돌이키지 못할 최악의 실수와 반복된 실수. 나도 어느새 니체의 삶에 위태롭게 내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파울 레처럼 해변에 머리를 쳐박는 건 아닐까. 두렵다. 벌써 1년 2개월이 지났다. 누군가 이 고통이 언제 끝나는지 귀띔해준다면 버틸 여력 있으련만. 요한계시록의 어린 양과 함께 승리한 사람들과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는 기다림을 견뎌낼 동반자라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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