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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기 Nov 25. 2022

첫 번째 사랑 말고, 첫사랑

말, 문이 막힌 순간들(2022/11/ -> 20230106 재업로드)

그런 생각이 들어. 앞으로 내가 느낄 감정을 벌써 다 경험해버린 게 아닐까. 그리고 여기서부터 앞으로 쭉 새로운 느낌은 하나도 없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Her 2013>


대학교 1학년, 20살 때 이 영화를 처음 봤던 당시 이 대사가 뇌리에 각인돼 잊혀지지 않았으나 뜻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땐 눈에 보이는 사물과 세계, 모든 것이 새로웠으니까. 이제서야 주인공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깊이 와닿는다. 이는 미래의 내게 던져진 공감과 경고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잠시 올해 초로 시계를 되돌려보자.


2022년 2월 어느 날 오후 2~3시 대학로의 한 카페


그녀 : 몇 달 만이지… 이렇게 만나니까 우리 꼭 이혼한 부부 같네


나 : 음… 결혼은 안 했지만 도장찍고 나서 각자의 연인 몰래 만나는 느낌이네


몇 시간 뒤 저녁, 대학로의 또다른 카페


그녀 : 앞으로 우린 다시 사귈 수 없어. 처음으로 우리가 몇 개월 동안 만나지 않았잖아? 내가 첫사랑이야? 그건 아니잖아. 3-4명 만났다면서


나 : 연애 초반에 이야기 했잖아. 고등학교 때 빼면 성인 이후 3명. 여자를 만난 경험이 별로 없고, 기간도 다 몇 개월로 짧았다는 거.


우리는 서로 담배를 태우며 말 없이 상대방의 눈을 응시했다. 첫 만남부터 2년간 내가 그녀의 머릿 속을 들여다본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이 친구가 내 심리를 전부 꿰뚫고 있다.


나 : … 생각해보니까, 첫사랑이 맞는 것 같아. 첫번째는 당연히 너가 아니지. 지금껏 만난 친구들은 이젠 스쳐갔고, 2명은 이름도 기억 안나. 그런데 방금 질문에 머릿 속이 복잡해지다 명쾌해졌어.

너가 첫사랑이야. 그래서 작년 여름에 헤어지고 이제 반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실감이 안드네.


이후 나는 찌질하게 그녀가 내게 한 눈에 사로잡혔다던 2017년 추억의 부스러기를 자질구레 늘어놨다. 우리 사이 행복했던 과거와 피폐한 현재를 맞닿아 공명을 일으켜 인연을 재차 연장하고 싶어서다.


이 당시에도 우리는 만나는 사람이 없는 상태였다.


같은 해 3월 명동의 한 식당 옆 골목


그녀 : 나는 너가 아직도 나한테 미련이 있는 줄 몰랐어. 그 말은 취소해야겠다. 너는 너무 특별한 사람이라 혹시 다른 남자를 만나도 너의 존재는 밝히지 않고 몰래 만나자고 한 거 말이야. 그 전제는 철저한 친구 사이였어. 그런데 너는 아니였나보네.


나는 이 친구가 특이해서 좋았다. 에른스트 루비치와 에릭 로메르를 동시에 좋아하는 고상한 영화 취향과 모든 영화를 아우르는 안목, 대화가 잘 통하는 것은 물론, 170cm의 키에도 너무 엉뚱하고 귀여웠고, 몸매가 좋으니 뭘 입어도 예뻤다. 정치 성향도 얼추 비슷했고, 똑똑하기 까지. 완벽에 가까운 여자였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쟁취하려 2017년부터 영화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고다르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문외한이었다. 그녀가 영화의 기초를 많이 가르쳐 줬다. 미숙한 솜씨지만, 2017년 말에 <비브르 사 비>에 대한 6장 짜리 비평을 썼고, 그녀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알고 있다. 단지 기분좋으라고 행동하는 여자가 절대 아니었다는 걸. 그녀는 싫으면 면전에 대놓고 이야기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 날 이후로 적어도 그녀에게 만큼은 영화적으로 인정받았다. 2019년부터 그녀는 “이제는 내가 영알못 같냐?”, “나야, 영화야, 딱 말해. 하나만 골라라”라고 종종 사랑스런 장난을 쳤다.


내 또다른 첫사랑은 영화다. 비록 ‘여자 꼬시기’로 시작했으나 아무려면 어떠랴. 이제는 내 삶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됐는데.


잠깐 시간을 되돌려 올해 9월로 가보자.


나는 이날 처음으로 여동생과 맞담배를 폈다. 우리는 성인 이후 단 둘이서는 10분 이상 대화한 적이 없었다.


2022년 9월의 어느 새벽날


여동생 : 오빠, 아니, 야! 그냥 너가 잘못했고, 존나 답답하게 한거야. 이미 끝났어. 진짜 요즘 여자들은 남자들 하나하나 다 가르치면서 연애한다. 그 언니도 엄청 답답했을꺼야.


나 : 어… 정확하네…


서툰 연애 방식에도 삶과 영화를 가르쳐준 당신을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 역시 너 만큼 특이하기에, 너 또한 헤어졌음에도 나를 만났던 것 같다.


이처럼 괴상한 관계, 그나마 좋게 봐줘야 플라토닉 러브인 관계는 올해 5월 종말을 맺었다. 이런 경험을 했는데 새로운 사랑이 가능할까?


그러다 우린 지난 10월에 진정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https://youtu.be/1IPWLRZ10Uk


https://youtu.be/qODGmoIBj5E

https://youtu.be/whUFz5IoQ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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