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시부터 다섯시간, 서른다섯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잊고 살던 식곤증이 죽지도 않고 돌아왔습니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복귀한 후에 맞이하는 오후는 끈질긴 스스로와의 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규칙적으로 내쉬는 숨마저도 잠을 솔솔 부르고 있네요. 요즘 나오는 사무용 책산들은 전자동 기능을 탑재하고 있습니다. 레버를 누르면 징~ 소리를 내면서 입석할 수 있게끔요. 서있는 것보단 앉아 있는 것을, 앉아 있는 것보단 누워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저지만, 잠 앞에서는 아무래도 서 있어야만 강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오후의 시간부터는 서서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 있음에도 졸음이 굴하지 않고 찾아온다면,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새삼 인간이 서서도 수면을 할 수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가 또 궁금해집니다.
무릎 뒤에 고정이 가능한 철심을 박습니다. 서서 잘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
5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이후로 인간이라는 종은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비와 인간과 와 인간 눕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누워야 하는 사람. 첨단화되고 디지털적인 발전이 예상되었던 산업혁명과는 다르게, 오히려 이미 너무 발전해버린 세상이 택한 도약은 인간 노동력의 최대를 끌어올리는 작업이었습니다. 프로스튼이라는 박사가 뇌신경과 무릎 신경의 직접적인 뉴런 통로를 발견한 이후로, 비와식에 대한 연구는 급속도로 이루어졌습니다. 무릎 뒤에 유심칩만 한 사이즈의 알파 팁과, 구부러졌다 펴지는 나노 플라스틱의 심을 박게 되면, 상상되는 고통과 다리 저림 없이 편하게 일어서서 수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반발하고 일어선 것은 침대 업체입니다. 수년간의 노조 이슈에도 묵묵부답으로 반응했던 A업체는 서서 잘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자 그 어떤 단체보다도 빠르게 인권의 존엄성을 외치며 상용화 반대에 앞장섰습니다. 서서 잘 수 있는 기술의 출현 이후, 모두들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예상해왔지만 의외로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누워서 자는 건 수평으로 인간의 신장만큼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만약 서서 그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거라면, 자는 데에 발 사이즈만 한 공간, 아니 어깨만 한 공간만을 필요로 하겠지요. 인간이 살 수 있는 최소 평수의 기준이 훨씬 줄어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후죽순 고시원과 같은 규모의 집들이 공급이 되었고, 노동자 계층은 이전보다 값싸게 자가를 구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저마다 무릎 뒤에 반창고를 붙여대고 있었습니다. 자는 공간의 구획을 위해선 단지 동그란 원형의 카펫만 필요할 뿐이었고, 색색의 알록달록 카펫들이 시장을 점유했습니다. 인간들은 굳이 집까지 가서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 하에 사무실 체류시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도 했지만, 그만큼 근무시간보다도 수면시간이 확보되긴 했습니다. 다리 저리는 고통 없이 똑바로 서서 잠에 들 수 있다니, 우려되는 목소리는 실사용자들의 좋은 후기들에 의해 금방 묻히고 잦아들었습니다. 프로스튼 박사는 인류발전과 자본시장 노조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며 칭송받고, 이듬해에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서서 수면까지 해가며 일을 지속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열심히’사는 것처럼 비추어졌고, 어느 정도의 부가 있는 사람들은 비와 수술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열정과, 갓생에 목숨 거는 생활들이 전부 여유로워 보이지 못하고,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요. 비와 수술은 그럼에도 결코 값이 싼 수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정 가난한 사람들은 비와를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결국 누워서 자는 사람은 지나치게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둘 중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침대는 어느덧 사치품목이 되어버렸고. 초반에 비와 불매운동을 하던 침구류 업계들도 오히려 자신들의 상품의 프리미엄이 생기게 되자, 모두 앞다투어 고급 와식에 집중하며 마케팅을 해댔습니다.
아무도 더 이상 땅에 등을 대지 않습니다.
부유층은 오로지 침대가 있을 때에만 등을 허락했습니다. 침대는 그들의 자존심이기에 와인간임을 자랑스럽게 하니까요. 중산 노동자 계급은 눕지 못해 등을 땅에 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와 수술을 차마 접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함부로 야외에서 등을 내지 않습니다.
땅에 등을 내지 않는다는 건, 하늘을 수직으로 직접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잠시 고개를 드는 걸로도 하늘을 볼 순 있지만, 한가득 두 눈에 담아내는 일은 결국 없었습니다.
아무도 잔디에 눕지 않자 들판과 공원에는 야생풀들이 이 기세를 몰아 수직으로 길쭉길쭉 자라났습니다. 우거진 숲을 이루고 있는 한강 변의 공원들.
와인간과 비와인간은 각기 다른 이유들로 오늘 밤에도 무릎을 부여잡고 말겠습니다.
쓸데없는 공상을 피워 적어보았습니다.
상상과 망상을 여기에 두고,
2022년 10월 28일 PM 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