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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씨 Feb 25. 2023

내가 에든버러로 도망 온 이유

2017년, 20살. 뉴욕대학교에 합격했다. '어, 나 뉴욕대 다녀' 할 수 있을 정도의 네임 밸류, 외국인 학생인데도 주어진 조금의 장학금, 그리고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나는 꿈을 가득 안고 뉴욕으로 향했다.


자아라는 게 환상이 아니라면, 내 자아는 확실히 뉴욕에서 형성되고 굳어졌다. 페미니즘이란 게 뭔지 알게 된 것도, 당당하게 자신의 퀴어임을 드러내는 사람을 만난 것도, 인종차별의 역사와 사회의 불평등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 것도 다 뉴욕에서였다.


그저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직접 만들기보다는 영화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해하고 싶어서 뉴욕대학교 시네마스터디스, 영화학과에서 햇수로만 5년을 공부했다.


2021년, 24살. 마지막 학기가 되어서야 뉴욕에서 일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때는 이미 늦었었다. 더구나 팬데믹 기간이었다. 이렇다 할 경력이 없는 내게 스폰서가 되어 줄 영화사가 있을 리가. '숨마쿰라우데'가 각인된 졸업장은 힘이 없었다. '최우수'라는 뜻의 라틴어. 빛 좋은 개살구.


그 졸업장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주일도 안되어서 일을 시작했다. 뉴욕에서 취업을 실패했다는 패배감을 빠르게 숨겨야 했다.


2022년, 25살. 6개월 동안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프로덕션 매니저로 근무한 후, <기생충>을 만든 그 영화사 바른손이앤에이가 아닌 <불한당>을 만든 그 영화사 바른손에 취직했다. (사실 난 지독한 불한당원이었다.) 두 회사가 모회사–자회사 관계이긴 하다. 같은 건물에 있었고. 그렇게 난 드디어 한국 상업영화계에 입성하나 싶었다. 수습 기간을 잘 마치고, 정식으로 기획 제작 업무에 투입되면 나에게도 커리어가 생기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못 버텼다. 시장에 나오는 모든 콘텐츠를 다 꿰고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 네 명의 동기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는 부담감. 무엇보다도 돈이 되는, 투자할 만한 콘텐츠에 대한 안목을 가져야 된다는 그 궁극적 목표가 내가 가지고 싶은 목표가 아니었다. 내 아이디어는 아직 너무 어리고, 설령 각본을 쓰는데 참고가 된다고 해도 크레딧은 주어지지 않는 현실.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현실자각타임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생활. 동기들과 경쟁하되 두루두루 잘 지내고, 중간직급은 생략된 이 위계질서 속 적당히 굽힐 줄도, 내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암묵적 룰. 버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을 반쯤 인정하고 반쯤은 과장하며, '더 수련하고 때가 되면 하산하겠습니다'하는 심정으로 '대학원 공부가 절실합니다!' 외치고 퇴사했다. 그리고 9월에 시작하는 영국 대학교의 1년짜리 석사과정 몇 개를 추려, 공유오피스에 자리까지 구해 출퇴근하면서 지원서를 썼다. 그게 5월 초였다.


5월 중순. 서서히 미쳐갔다. 합격 레터가 안 오면 어쩌지? 내 인생을 어떻게 이어나가야 하지? 한국에서 계속 영화하겠다고 최저시급 받고 일하며 버텨야 하나? 온갖 걱정에 인간도 시들 수 있음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8월에 열리는 전기차 경주대회를 주최하는 곳에서 잠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대학원 지원 결과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고 다른 곳에 몰두할 수 있는 찬스였다.


하지만 또다시 현실자각타임이 시작된다. 이 나라에서 일한다는 건 결국 다 똑같은 걸까. 일손과 시간이 부족하면–사실 대부분의 일터가 이런 듯하다–쉽게 아수라장이 되는데, 여긴 그 아수라장 속에서 '이렇게 해도 결국 되긴 된다'식의 마인드로 8월 대회 개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물론 내가 큰 그림은 보지 못하고,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며 본 단편적인 것들을 이어 붙여 대혼란의 지도를 그려보고 있었던 걸 수도. 하지만 체계가 부족해 내가 보기에도 막막한 상황들이 자주 연출되곤 했다. '평창에서 영화제 처음 개최하는데 거기서 일 했을 때도 이 정돈 아니었어'하며 묘하게 영화계 종사의 꿈을 이어나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영화제 근무자들은 어떤 영화제든 '1회'땐 절대 일하는 거 아니라고들 한다.)


대학원 지원 결과가 왜 이리 늦어지는지, 설마 불합격하면 연락도 안 주는 건지 별 생각을 다 하며 심신이 미약해져 갈 때쯤, 그리고 딱 그 시점에 사무실에서 유행하던 코로나에 감염됐을 때쯤, 지원한 두 학교에서 합격 메일이 왔다. 킹스 칼리지 런던의 컬처 앤 크리에이티브 인더스트리 석사 과정. 그리고 에든버러 대학교의 인터미디얼리티('미디어관계학' 정도로 해석 가능) 석사 과정.


두 학교 모두 랭킹 상 나쁘지 않았기에 결국 런던이냐 에든버러냐의 문제가 됐고, 똑같은 돈을 가지고 산다고 할 때 삶의 질은 비교적 물가가 싼 에든버러가 낫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꽤 쉽게 킹스 칼리지 런던의 오퍼를 무시하고 에든버러에 가기로 결정했다. '남들이 잘 안 하고 잘 모르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라 신생학문이자 학과인 인터미디얼리티를 선택한 것도 있다. 바른손에서 근무할 때 문학의 영상화, 각색에 살짝 심취해 있던 탓도 있겠다.


아무튼 그렇게 2022년 9월, 나는 에든버러에 왔다. 솔직히는, 도망 왔다. 지긋지긋한 한국의 노동 환경으로부터. 뉴욕 취업 실패로 인한 패배감으로부터. 어딘가에 소속되어 유무형의 가치를 생산하며 사회인으로서 기능하고 있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 같은 불안감으로부터. 현실이 된 망할 '아프니까 청춘이다'로부터.


에든버러라는 이(異)세계로 툭 떨어져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석사 과정 수료 후 주어지는 2년짜리 취업 비자를 십분 활용해 이번에는 기필코 해외취업 성공! 영화계 커리어를 쌓으리라! 다짐하며 에든버러에 왔는데... 내가 간과한 것은 에든버러는 날 초대한 적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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