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군가에게 작가로 불릴 만큼 많은 집필을 하지도 않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B사의 창작 계정 역시 삭제된 상태이며,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작은 인스타그램 계정에 있는 쪽글이 전부인, 내가 여기서 어떤 말을 한다 한들 아무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가진 영향력보다, 쌓이고 쌓인 의견이 가질 영향력의 힘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존경하는 작가님을 지지하기 위해 한마디라도 더 보태고 싶다. 내 마음이 기울어 있다고 하여, 내 의견이 기울어진 상태로 쓰는 글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창작 윤리, 창작의 자유. 이전에 나는 지금의 세상이 너무나 불편하다. 어딜 가나 깜빡이는 블랙박스에 나는 찍히고 있고, 사각지대도 찾기 힘든 수많은 CCTV에 내 모습이 찍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너에게 신경 쓰지 않아, 오버하지 마.'라고 말하지만 내가 찍히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고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그 사실에서 오는 것이다. 바깥 활동을 다루는 유튜버들은 허가되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을 블러처리하거나 가린 채 업로드하는데, 문제는 그건 편집본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원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얼굴만 가렸을 뿐, 그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은 후편집으로 얼굴을 떼어내든, 목소리를 변조하든, 한눈에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 역시 문제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고?
문제가 된 소설은 김현지 작가(이하 김 작가)가 주변에서 연락을 받을 정도로 특정되기 쉬웠다. 아무리 정 작가가 소설 속 그는 김 작가가 아니다라고 광장에서 외쳐봐야 그 소설을 접한 사람들은 김 작가를 떠올린다는 것이다. 글이나 말이라는 것은 뱉어낸 순간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심지어 김 작가가 주변에 알려지기 쉬운 직업을 가지고 있다면 더더욱 문제가 된다. 김 작가를 알고는 있지만, 따로 연락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당 소설들을 접하고 김 작가를 떠올렸을 때, 그들의 귀에 광장에서 소리친, 김 작가가 아니다는 그의 외침이 그 사람들의 귀가 아니라 생각까지 닿을 것인가.
에세이 작가를 꿈꾸는 나는 언제나 커다란 문제를 마주하고 만다. 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선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함부로 남의 이야기를 글에 써서 '박제'해두고 싶지가 않다. 그는 경솔한 일이다. 옳지 못한 일이다. 왜냐고? 그들은 실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문학적 장치로 서사를 바꾼 들, 적어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들을 한 명 한 명 찾아가 내가 이러이러한 글을 쓰려는데 너의 이야기를 쓸 거야. 그런데 아마 좋지는 않을 거야, 라고 모두에게 양해를 구할 수도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럴싸한 문장과 문학적 기법으로 포장을 했든, 담백하게 사실만을 전했든, 당사자가 특정되고, 특정된 당사자가 고통받는 상황에서, 이건 니 얘기가 어느 정도는 맞지만 네가 아니야, 소설 속 이야기일 뿐이지. 라고 하는 말을 듣고, 아 내가 아니구나, 나 아니래, H는 현지가 아니고 현지는 흔한 이름일 뿐이야. 근데 다들 너라고 생각했고 네가 상처를 받았구나, 미안해. 라는 말은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타인의 이야기를 쓰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괴로운 과거를 자꾸만 파고드는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철이 들지 않은 어린 시절, 그림 몇 장으로 선망하던 사람들의 관심에 들었던 적이 있다. 나는 그게 무슨 명패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그건 나의 명패가 아니다, 그들의 명패일 뿐이지. 그저 당신은 유명한 김 작가의 이야기를 알게 된 것,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쓸 기회를 얻은 것, 그리고 글로 써서 지금처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방향이든 아니든 간에) 이전과는 다른 큰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을 은근히 즐기며 변호사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 절판을 미루는 것에 그 어떤 티끌만큼의 욕심도 없는 것일까. 나는 거기에 의문이 든다.
처음부터 김 작가가 원했던 것은 사과였다. 같은 작가로서 최소한의 예의였던 그 망할 놈의 진심 어린 사과. 그 조차 제 때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통받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일 뿐이라면, 망할 놈의 창작 윤리는 몇 명이 고통받아야 다시금 우리들의 입에 올라 재정비될 것인가. 두 명? 세 명? 다섯 명? 열 명? 창작 윤리는 사람의 목숨에 절대적 무게를 부과하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