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경험'이라는 진부한 이야기
순간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온전히 좋은 일도 완전히 나쁜 일도 존재하지 않는다.
2019년 10월 나는 무작정 벨기에로 날았다. 오로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숙소와 비행기표와 공연 티켓만 준비한 채 계획 없이 출발했던 여행은, 역시나,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출국 시간이 임박했는데 게이트가 조용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공항 직원에게 비행기표를 보여주며 출국이 지연되고 있냐고 묻자, 여기는 입국 게이트라는 대답을 한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최선을 다해 안타깝다는 표정을 하고서, 지금 시간이면 내가 타야 할 비행기는 이미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덧붙였다. 인천공항 1층에서 3층까지 캐리어를 던지다시피 밀며 뛰었다. 웃는 얼굴을 여럿 지나쳤다. 3층에서 아시아나 항공의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을 발견했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그가 나와 같은 비행기를 탈 것이라는 걸 알았다. 비로소 비행기는 쉽게 출발하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현실이 됐다.
내가 탄 비행기는 독일 프랑크프루트 공항을 경유해서 벨기에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이번엔 분명히 맞는 게이트에서 대기하고 있는데도 비행기가 도착하지 않았다. 내 티켓을 자세히 보던 직원이, 이 비행기는 12시간 후에 도착한다고 설명해 줬다. AM과 PM을 헷갈린 것이다. 나는 그렇게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도 나의 실수를 안타까워하는 직원을 마주했다. 비행기를 놓친 것도 아니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 시간이 임박하면 사람이 많아지다가 한산해지고, 그다음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지면 다시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밀물과 썰물 같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말을 건넨다. 혹시 옆 자리에 앉아도 되겠냐 묻길래 살짝 비켜 앉으며 그러시라고 대답했다. 휴대폰 충전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며 하소연을 해온다. 나는 비행기 시간을 잘못 봐서 밤새 공항에 있어야 한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그는 내 손에 들린 잭콕 캔을 가리키며, It'II help(그게 도움이 될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잠시 거쳐가는 공항이라도 여긴 독일인데, 그저 가만 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24시간 식당이나 바를 찾아서 밤새 시간을 보낼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항버스 정류장에서 퇴근 버스를 기다리던 직원에게 혹시 공항 근처에 24시간 식당이나 바가 있냐고 물었다. 그는 아주 친절하게 근처에 아시안 식당이 있다며 자세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고맙다고 꾸벅 인사하고 돌아서며 다소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근데 아무리 걸어도 공항에서 나갈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을 것만 같은 큰 공항인데, 출구만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맸다. 그러다 다시 한번, 지나가던 공항 직원에게 출구가 어디냐 물었다. 그는 '걸어서' 나갈 수 있는 출구는 없다고 했다. 교통편을 이용해 나가야 한다고. 그래서 혹시 공항 내에 24시간 식당이 있냐 물었더니 지하에 맥도널드가 있다고 했다. 혹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없냐고 묻자, 공항 내 힐튼 호텔 로비에 괜찮은 바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감사하다 인사하고 돌아섰다.
힐튼 바는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밤새 다음 비행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감사하게도 혼자서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위험하니 우리 숙소에서 자고 가라며 권해주었다.
여행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캐리어를 두고 나온 것이다. 몇 시간 눈 붙이러 들른 곳이라, 호수도 확인하지 않았다. 비행시간이 임박했는데, 짐이 없다. 현금은 캐리어에 들어있었다. 항공편으로 문의 전화를 했더니 내가 경유할 비행기는 해외 항공사의 비행기라는 대답을 들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이륙 시간은 십 분 남짓 남았는데, 여전히 짐은 찾지 못했고, 친구들은 자느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다음 생각난 곳이 대사관이었다. 아,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 대사관 직원의 목소리가 들리니 꾹 참았던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내 얘기를 듣던 대사관 직원이 내게 차분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문제가 뭔가요? 짐을 잃어버리신 건가요? 비행기를 놓치신 건가요? 그 말을 듣자, 벅차오르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저 못 도와주시죠?라고 되물으니 영어 통역은 해 줄 수 있다고 한다. 영어는 저도 해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라고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독일에 사는 친구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도와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여러 걱정과 감정들을 억누르며, 나는 우선순위를 정했다. 문제해결이 우선이다. 우는 건 그 뒤에 하자고 생각했다. 공연을 위한 여행이어도, 공연을 위해 짐을 포기할 수는 없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호텔에서 자고 있는 친구들이 일어나길 기다려 짐을 건네받은 뒤, 공항에서 비행기 문제를 해결하자. 그 후 예약한 항공사에 문의하면 다른 시간대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다급하게 호텔에 있던 친구 한 명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늦게 받아서 미안하다는 친구에게, 전부 내 실수이니 마음 쓰지 말라고 대답했다. 작별 인사를 하며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인사했다.
짐을 되찾은 다음 공항 안내데스크에 도착했다. 100유로의 추가금을 지불하고 한 시간 뒤 비행기표를 받을 수 있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니 울음이 아니라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정말로, 제시간에 제자리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여권과 티켓이 사라졌다. 돌아온 길을 되돌아가니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근처 매점에서 물을 산 뒤, 여권을 그대로 둔 채, 지갑만 들고 왔던 것이다. 어렵게 탑승한 비행기는 작고 불편했다. 그러나 그게 또 즐거웠다. 활주로에서 직접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에서 하늘에 비행기가 너무 많아 이륙이 지체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비행기를 놓칠 뻔하더니, 기어이 놓쳤다. 그리고 다음 비행기를 탔는데, 하늘이 막혀서 기다리 는 중이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이상한 여행이다. 웃음이 났다.
벨기에 공항에서 내린 뒤엔, 숙소까지는 기차를 타야 했다. 그런데 또 문제가 발생했다. 기차에 앉아서 한숨 돌리고 구글 맵을 켰는데 내 위치가 목적지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구글 맵을 탓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괜히 휴대폰 위아래를 뒤집어 지도를 본다. 정신을 차리고 기차에서 내렸다. 옆을 지나가던 분에게 제가 기차를 잘못 탄 것 같다며, 목적지가 적힌 티켓을 보여주었다. 그분은 자기는 지금 출장에서 드디어 돌아왔기 때문에 아주 기분이 좋고 한가하니 기차 타는 법까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살았다. 나는 그에게 고개숙여 인사했다.
유럽의 기차는 우리나라의 지하철과 비슷한 수준으로 대중적인 교통수단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하 철과 다른 점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열차가 정해진 정거장을 지나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생소함 때문에 훨씬 복잡했다. 원하는 목적지에 가는 열차가 어느 선로로 들어오는지 확인한 뒤에 시간 맞춰서 기다려야 한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기차표를 들고 크게 붙어있는 시간표를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그쪽 표가 아니 라 옆의 표를 봐야 한다고 알려주신다. 이유를 묻자 주말이 적힌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열차의 평일과 주말 일정이 다른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대답했다.
그렇게 무사히 도착했다. 발코니석은 마치 절벽 같았다. 바로 아래를 보면 다리가 저려왔다. 무대를 보면 설렌다. 생의 첫 오케스트라 공연이다.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데 피아노가 없었다. 실수가 가득했던 여행길을 떠올리며, 공연도 잘못 온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하나 둘 자신의 악기를 들고 무대에 자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혹시 조성진이 자신의 그랜드 피아노를 끌고 들어오는걸까. 그런 황당한 상상을 했더니 웃음이 났다. 공연은 완벽했다. 내 삶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시간은 없었다. 나는 이 기억들을 아주 오랜 시간 간직하며 살아갈 것이다.
Dec 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