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실재(實在)하는 것
가만히 누워서 두통이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두통이 눈에 보인다면 어땠을까
편두통은 일반적인 두통과는 달라서 단순히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만으로 괜찮아지지 않는다.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란 생각으로 잠에 들어도, 마주하는 것은 상쾌한 다음날 아침이 아니다. 더 심해진 두통과 열감 그리고 위장이 뒤집어지는 듯한 메스꺼움 때문에 어두운 새벽에 잠에서 깬다. 모든 소리는 소음이 되고, 모든 냄새는 악취가 된다. 미약한 빛들이 머리를 찌른다. 날 선 감각들이 정적을 채운다. 오감의 고통들 속에서,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가장 빨리 진료를 시작하는 가장 가까운 병원을 찾아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밤 보다도 긴 새벽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편두통이란 외로운 질환이다. 누군가 두통은 삶의 질을 떨어트린다 했던가. 모두에게 해당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내 일상을 조금 변화시키긴 했다. 나의 편두통에 효과가 있는 약은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없다. 그래서 외출할 때는 항상 해당 약을 챙겨야 한다. 약 챙기는 것을 잊을 수도 있으니 화장품 파우치나 외투 주머니에 하나씩 넣어 두기도 한다. 비상시를 대비해, 언제든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지갑에는 약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항상 넣어두고 지낸다. 약의 이름을 아무리 자주 외워도 번번이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잊히고 마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정작 머리 아프다는 말은 입 밖으로 점점 덜 꺼내게 되는 것이다.
적절한 때에 적절한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편두통은 눈밭 위를 구르는 눈덩이처럼 증상을 더해간다. 그러다 굴리던 사람까지 집어삼킨다. 자주 가던 내과 선생님께서 하루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주셨다. 제 때에 불씨를 잡지 않으면, 물을 한 두 번 붓는 것으로는 불을 전부 끌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러니 언제나 편두통 이 시작되는 느낌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필요에 의해 자연스럽게 예민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건 강박적인 예민함 뿐이다. 설명을 해도 그때뿐이다. 매번 설명을 하면 자주 아픈 사람으로 이해받기보다는,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엔 단 한마디의 설명조차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병원에서는 다르다. 의사들이 필요한 처방을 준다는 일차원적인 이유도 있다. 그러나 편하게 말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적어도 그들은 스스로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공부하여 인지하고 있고, 그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라는 데서 오는 안도감 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차라리 편두통이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질병이면 어떨지 종종 생각한다. 나는 어릴 때 코피가 자주 났다. 다행히도 그건 다른 질병의 증상이 아니라 단순히 코 내부의 점막이 약했던 탓이다. 그러니 피가 나는 것 말고는 아픈 곳도 없었다. 그저 조금 귀찮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내 코에서 피가 난서 나 자신이 되려 미안해질 정도로, 걱정을 해주곤 했다. 코피에 대한 괜찮아요 라는 말은 두통에 대한 머리가 아파요 라는 말만큼 무력했다. 어느 쪽이 실제로 나 자신에게 더 고통스러운지는 타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서도 스스로를 통해 자신의 감각으로 느끼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기 때문이라 본다.
신경 쓰고 챙겨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 번거로운 것이다. 그러나 번거로움은 익숙함으로 지워지기 마련이다. 습관이 되는 순간 매일 쓰는 안경처럼 일상이 된다. 오히려 두통이 괜찮아지는 약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두통 자체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듯이 약에 대한 감사함도 매 순간 변함없다. 내게 맞는 처방을 받기 전까지 무용한 약을 삼키며 울던 때를 생각하면 이 정 도의 번거로움은 오히려 행복할 지경이다.
한 번은 다른 지역에서 처방을 위해 내과를 들른 적이 있다. 약 이름이 적힌 쪽지를 두고 오는 바람에, 휴대용 약통에서 하나 남은 약을 꺼내 직접 보여드렸다. 이 약 이 필요해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저도 학부생일 때 편 두통이 심해서 항상 지갑에 약 넣어서 다니곤 했어요. 하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
편두통을 경험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반가웠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큰 위안이 된다. 타인이 나의 고통에 대해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을 끊임없이 버리며 살아왔음에도, 결국 같은 고통을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남몰래 무장해제되는 마음은 별 수 없다보다.
편두통은 외로운 질환이다.
Feb 0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