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시작되고 어느 날 끝나버린
찌는 듯한 더위와 조금만 스쳐도 짜증을 불러일으키던 습도마저 괜찮게 느껴지던 날들에 손을 꼭 붙잡고 다니던 게 떠오른다. 6번의 뜨거운 여름을 지나보내며 우리는 점점 멀어졌다. 함께 떠난 바다, 함께 본 영화들, 여름을 채운 수많은 것들이 빛바랜 추억이라는 미명 히에 버려진 조각이 되어버렸다.
무엇을 하든 찬란했던 20대 초반의 삶을 가득 채우고 떠난 과거의 인연에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다 망해버리면 좋겠다 저주를 퍼부은 날도 있고, ‘그래, 어디 잘 먹고 잘 살아라’며 비아냥거림이 가득한 행복을 빌었던 날도 있다. 대부분의 날은 바빠서 잊고 지냈지만 2000일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연을 단번에 끊어낼 수는 없었다.
살을 파고드는 뜨거움에 문득 최근 꾼 꿈이 떠올랐다. 소개팅이 잘 되어 간다며 응원해달라던 모습과 다시 만나자며 매달리던 모습이 등장한 개꿈들. 서로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피곤하게 만들던 꿈속의 그를 떠올리다 곧 정신차렸다.
나도 모르게 시작되어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끝나버린 사랑이 주는 교훈은 이것이다. 오래된 시간에 기대어 나를 버리지 말 것. 내게 허락된 이 시간을 지나간 기억에 사로잡혀 버리지 말 것. 이건 어디에도 적용된다. 그 사람과의 추억이 아니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