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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에 흔들린 꽃들 Apr 08. 2023

발코니는 없다

조용히 사라져 간 것들

발코니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어느 토요일이었다. 분명히 이 작은 원룸에 붙어있던 발코니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발코니를 목격했었는지 기억을 되감아봤다. 금요일 저녁, 회식으로 늦게 귀가하자마자 화장만 대충 지운 뒤 바로 잠들었다. 슬라이딩 도어 너머에 발코니가 아직도 잘 있는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 누구도 잠들기 전에 이런 걸 확인하지는 않는다. 나는 한 뼘 정도 열린 슬라이딩 도어 사이로 쏟아지는 늦은 오전 햇살을 맞으며 선 채로 얼마 동안 생각해봤지만, 발코니의 마지막 모습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숙취로 인해 정신이 멍했어도, 그곳엔 얼마 전까지 발코니가 있었고 이젠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일단 점심을 먹고 다시 발코니가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아까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펜스가 눈에 들어왔다.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흔한 철제 펜스였다. 고작 2층 높이였지만. 누군가 내가 어제 출근했던 사이에 공사라도 했던 걸까? 나는 몸을 웅크려 발코니가 시작되던 곳과 원룸 내부 사이의 경계선을 살펴봤다. 무엇이 잘려나간 흔적이라든지 새로 덧칠한 흔적 같은 건 없었다. 만약 공사를 했다고 쳐도 왜 발코니를 제거하는 수고를 들였을까?


한쪽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열 걸음 정도밖에 안 되는 집안을 서성거리며 토요일 오후의 대부분을 써버렸다. 주말에 발코니가 특별히 필요했던 건 아니었지만 예기치 못한 발코니의 실종으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 끝내 찾아온 두통은 전날의 과음 때문이라 여기기로 했다. 용기를 내어 해가 지기 전에 집주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발코니가 안 보이는데, 혹시 무슨 공사라도 한 건가요?”

집주인으로부터 답장은 없었다. 나는 주말이 끝날 때까지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수도가 고장 났거나 난방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발코니가 없어졌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슬라이딩 도어를 열어봤지만, 없던 발코니가 기적적으로 귀가했을 리는 없었다.

“정말 여기 발코니가 있던 게 맞아?”

남자 친구는 재차 물어봤다. 그도 나처럼 몸을 숙인 채 경계면을 유심히 보고 나서 공사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결론을 내렸다.

“정말로 있었다니까. 내가 지난여름에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그 발코니가 마음에 들어서 계약했어. 그래서 정확히 기억해.”

남자 친구는 양팔을 벌려가며 이제는 없어진 발코니의 면적을 상상하려는 듯했다. 그의 상상대로 발코니는 성인 남성이 양팔을 벌린 딱 그 정도 크기였다. 요가매트 하나조차 완전히 펼칠 수 없을 만큼 작지만 나름대로 아늑한 공간이었다.

“나는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이 원룸에 셀 수 없이 들락거리면서 왜 발코니를 본 기억이 없을까?”

“그건 네가 여기서 원하는 게 발코니 같은 것이었던 적이 없으니까!”

그가 원룸을 방문하는 목적은 대부분은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하기 위함이었고, 그게 아니면 술에 취한 나를 내려놓고 떠나기 위함이었다. 아침햇살을 맞으며 발코니에서 단둘이 커피를 마시는, 그런 낭만 같은 건 그를 이 좁아터진 공간으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나는 월요일 퇴근길에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응답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시간에 이 집을 보여준 부동산에 연락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집주인이 외국에 오랫동안 나가서 연락이 힘들 거라고, 중개업자는 말했다. 그리고 다른 연락처로 연락을 취할 테니 더 이상 집주인을 귀찮게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물론 공사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으며 발코니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발코니가 없어진 후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다. 언제 없어졌는지도 기억할 수 없는 그 공간이 나에게 정말 필요하긴 했던 걸까? 시간이 지날수록 발코니에 대한 기억은 흐려져 갔고, 나중엔 어떻게 생겼었는지조차 뚜렷이 기억나지도 않게 됐다. 결국엔 여기 발코니가 있긴 했던 건지, 내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닌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 친구도, 집주인도, 부동산 중개업자도, 그 누구도 발코니 따위엔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슬프게도 그 발코니는 나에게조차 언제 없어져도 모를 사소한 공간일 뿐이었다. 나는 그 유일한 사실을 힘겹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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