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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Nov 11. 2023

무제

난 분명 추운게 정말 싫거든, 근데 꼭 이렇게 몸 속까지 한기가 들어와야 비로소 제정신을 찾는 것 같아. 애초에 글을 쓰는 시기가 꼭 귀신같이 11월에 찾아오고 날이 따뜻해질 무렵부턴 뭘 쓸래도 도무지 쓸 수가 없다니까.


짐승들이 겨울잠에 들듯이 내 겨울 또한 다음을 위한 재정비 시간인걸까.


올해 유달리 일이 많았어. 원래 한 해라는게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집약된 시간이지만 올해는 역대급이더라.

내 새로운 면도 알게 되고, 여전하고 참 고쳐먹기 힘든 면도 다시금 실감하고 그랬어.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걸 골라보자면 역시 방송이겠지. 방송을 시작한 뒤로 무언가 붕 뜬 삶을 살아. 하고싶지 않은데 억지로 해야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가령 수준낮은 인간들 비위를 신경써야 한다던가, 소신과 반대되는 말들을 해야 책잡히지 않을 수 있다던가...


난 그동안 내가 공부를 싫어한다고 느꼈는데 아닌 것 같아. 진짜 하기 싫은 건 고작 귀찮고 어려운 수준을 넘어 나 자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갉아먹히는 기분이야.


다른 방송인의 무례한 행동에 바로 1대1로 들이박은 일이 있었어. 친한 방송쪽 지인은 이 일에 대해 척 질 일을 만들지 말라던가, 왜 굳이 손해를 감수하냐던가, 나아가서는 그냥 미안하다고 카톡하는게 어떻겠냐고 하더라.


그렇게 체급이 큰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돌고돌아 나에게 안 좋은 영향으로 나중에 돌아올까 걱정한거겠지.


내가 일방적으로 이용당하고 손해를 입은 일에 경고를 날린 걸 내가 사과해야하는 같잖은 상황에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우스운 건 그 지인 말도 이해가 된다는거야.


그냥 영악하게 내 이익만 챙겨도 되는 걸 왜 자존심 때문에 굳이 전면전을 해서 손해를 보냐는게


아 분명 정말 맞는 말이고 그게 잘 하는 거라는 것도 아는데........

그걸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기엔 내가 절대 못 버틸 것 같더라고.


대체 누가 나보고 영리하대. 나는 단순하고 무식해. 뱀처럼 감정 죽이고 싫은 상대한테 웃어가며 실리 챙길 깜냥이 안돼.


나는 나랑 진솔하게 살아낼 사람이 필요하지, 버러지같은 사회에서 잘 숙이고 잘 챙겨먹는 방법 알려주는 사람이 아직은 필요하지 않다고.


분명 방송을 시작한 이유는 하고싶은 걸 하기 위함이었어. 그냥 여행 좀 마음 편히 다니고 싶었고, 예쁜 옷이나 가방들을 명품이든 보세든 마음에 들면 사고싶었고, 내 집도 하나 마련하고 싶었고... 가족들이 고작 돈 가지고 힘들어하는 꼴도 보기 싫었어.


물질적인건 하고싶은대로 해 이제는. 근데 병신한테 병신이라 말하는 걸 못해.


그동안의 나는 하고싶은 말, 행동, 일을 전부 해왔고 지금의 내가 되레 아무것도 못한다는 걸 알게됐어. 내 소신대로 말할 수 있던 건 그걸 알아듣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이고 내가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던 건 공부를 하고 대회에 나갈 때였어.


 난 자존심과 신념으로 살아가는 사람인데 이제는 둘 다 무너져서 명품을 걸쳐도, 비싼 음식을 원없이 먹어도 공허해.


그래도 가족들한테 그 비싼것들을 줄 때에는 행복해. 유일하게 내가 돈으로 행할 수 있는 신념이라 그런거겠지.


아이러니하지. 난 이런 모순들이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왜 온전히, 오롯이, 완전히 존재하는게 없는 걸까. 왜 무언가를 얻으면 꼭 잃는게 있어야만 하는걸까. 왜 내가 바라는게 대단한게 아닌 것 같은데 이상처럼 보이는걸까. 왜 다 이모양인건지. 왜 나는 편안해질 수 없는걸까?


엄마는 요즘 얼굴이 참 좋아보여. 힘든 일을 그만뒀거든. 이제 엄마가 그 개고생을 해가며 벌어야만 했던 200만원은 내가 이틀만에 벌 수 있는 돈이 됐어.


집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고, 친구들과 가족들을 만나러 가고, 필요한 게 생겨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의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다면야 자존심 좀 굽히고 카메라 앞에서 쇼 좀 하는게 뭐 대수인가 싶을 때, 그 마음을 원동력 삼아서 버티고 있어.


근데 이따금씩 그냥 과외비나 좀 벌면서 학교다니던 때가 그리워. 이따금씩이 아니라 거의 매일. 눈물이 날 정도로.


월에 몇천을 벌면서 가난한 대학생을 그리워하는게 비정상적인 걸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


나는 그냥 뭘 하든 만족을 못하는 인간이라 꼭 지나간 뒤에 그리워하는 걸까.


내 목표는 2년동안 최대한 많은 돈을 모으는거야. 그래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거야. 그때는 내가 그리워한 친구들도, 적절한 시기도, 무엇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겠지만


미련만이라도 해소할 수 있겠지, 아무도 없는 그 학교에서. 아니면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는거고.


뭐든 정해진 건 없겠지...


아무것도.


그래야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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