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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Mar 03. 2023

시의 정도에 관하여

正道의 시

오늘도 어김없이 국어 과외 수업을 하던 날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겪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앞에서 나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우리의 목표는 학문을 이해하는게 아니야. 점수를 잘 받는거지. 시든, 소설이든, 비문학이든 너의 생각을 얹으려 하지마. 그냥 주어진대로만 읽고 주어진 내용만큼만 사고하란 말이야. 알겠어? 너의 주관을 여기에 집어넣어봤자 문제 푸는데에는 방해밖에 안돼."


이게 선생님 소리를 듣는 내가 해도 되는 말인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지만, 정말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맞았다. 많은 학생들이 나름대로의 창의성을 가지고 지문을 바라보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그건 그저 공부 못하는 애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국어든, 영어든, 어떤 과목이든, 점수를 잘 내기 위해서는 모든 문제가 고만고만한 틀에 꼭 박혀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빨리 깨닫고, 그 틀에 맞추어 사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게 기술이고, 숙련도고, 내공이었다.


"스스로를 깡통이라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풀어. 나는 시키는 것밖에 못하는 문제풀이 기계다, 깡통이다, 나는 생각할 줄을 모른다, 계속 최면을 걸라고."


20년치의 수능과 모의고사 기출만 쭉 돌려봐도 문학 영역에서는 모르는 지문이 없게 된다. 당연한 결과인게, 애초에 영역이 고전과 현대이지 않은가. 과거에 쓰인 작품은 한정돼있고 문제는 계속 새로이 만들어져야 하니 쓰이는 지문들이 반복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능 국어를 잘 푼다는 건 딱 이정도였다. 대단한 이해력도, 재능도 없이 그저 익숙해지는 것. 문학이 아니더라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점수가 높다는 건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대단한 능력은 아니지만, 잘 써먹을 줄 알게 된 덕에 시급 4만원을 받으며 일을 하고있다. 수능 1등급과 애들 성적을 이만치 올려놨다는 커리어, 그리고 동네 엄마들의 입소문, 줄줄이 들어오는 과외 문의.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건 정말 딱 '문제를 푸는 방법'이었다. 수능 문제가 얼마나 다채롭지 못한지, 얼마나 기계적인 풀이를 요구하는지만 알려줘도 감이 있는 아이들은 금방금방 성적이 올랐다.


덕분에 공부를 잘 하게 되었다며 아이들은 찬사를 보내고 어머니들은 상품권을 보내온다. 우습게도 나는 그 애들에게 공부를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번 국어 수행평가 왜 이래? 미친거 아니야?"


"내 말이. 시 하나 가지고 B4 한장 빼곡히 채운 감상문을 당일 수업시간 안에 쓰라는게... 그리고 평가항목은 뭐가 이렇게 많은데?"


"심지어 이걸 6주 연속으로 진행한다며. 미치겠다. 공부에 도움도 안되는 수행을 왜 이렇게 빡세게 한대?"


국어 수행평가 방식이 공개되자 학생들은 울분을 토했다. 그 웅성거림 속에서 나 또한 15줄이 넘는 평가 항목을 머릿속에 집어넣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날부터 기숙사의 방 불은 꺼지는 날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등이 되어도 4명의 노트북 화면 불빛으로 인해 방 안이 환했다.


특목고 특성상 수행평가 방식이 악랄했던 적은 왕왕 있었기에 새로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국어 수행평가는 역대 최악의 수행평가로 꼽힐 정도로 힘들었다. '감상문'을 쓰라면서 조건을 잔뜩 들이밀어 온전한 내 생각을 자유로이 쓸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양은 많은데 시간은 부족해 45분을 다 쓰고나면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아파왔다.


성적에 하등 도움도 안되는 행위로 시간과 노력과 마음을 투자하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깊은 회의감과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해야지 어쩌겠는가. 기계적으로 정돈된 감상문을 쓰기 위해 무감정한 시선과 마음을 담아 시를 읽어야 했다. 재밌을리 만무했다.


친구와 함께 여느때처럼 써먹을 시를 둘러보던 중 이형기의 낙화가 눈에 들어왔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걱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좋은 시다.  표현법, 주제, 정서 무엇 하나 빠뜨릴 것 없이 완벽하다.


"질척거리지 말고 떠날 때 떠나라는 건가봐."


"그리고 이별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고 사람이 성숙해질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종합해보면, 이별을 너무 절망으로 받아들이며 집착하지 말고, 끝낼 땐 끝내되 성숙을 위한 양분으로 삼으라는건가?"


"맞네."


"맞는 말이네. 좋네.“


“그치“


“...”


“...”


“근데 왜 이렇게 재수없냐.”


"ㅋㅋㅋㅋ 뭐가 재수없는데?"


"그런게 있어. 이 미묘한 불쾌함..."


 

이형기씨. 가야할 때를 알고 질척임 없이 떠나는 거 좋죠. 꽃같이 아름답던 사랑이 지고 낙화가 된다니,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표현 참 좋네요. 찬란했던 시간은 결국 꽃처럼 영원하지 않다는 걸까요.. 이별은 아프지만 결국 열매라는 성숙을 남기기 마련이라는 걸까요. 참 맞는 말이네요. 정말로요.


그쪽이 보는 제 뒷모습은 어떤가요. 분명 아름답지는 않을거예요. 내가 목숨보다 사랑했던 내 개는 떠난지 2년이 됐는데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고요, 걔로 인해 사랑에 대한 내 공포감과 죄책감만 커졌지 성숙해지는 일 따위는 없었어요. 내가 가장 닮고싶었고 사랑했고 존경했고 애정을 갈구했던 아빠는 나를 버리고 사라졌어요. 나는 그 인간이 고통스럽게 살다가 혼자 늙어죽는 꼴을 보던, 자살하는 꼴을 보던가 해야만 웃으면서 '바이바이!'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개도, 아빠도 사실 이미 끝난 관계에요. 되돌릴 수도 없어요. 당신 말대로라면 나는 가야할 때가 지금이고, 그걸 알아야 하고, 그 둘이 사라진 나의 남은 앞날을 바라보아야겠죠. 그치만 나는 당신처럼 고상하게 이별 못해요. 이형기 씨는 나랑 같은 상황에 처해도 저 시와 같은 말을 할건가요? 그래서 재수없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당신이 하는 말은 이해했어요. 마치 개념은 명확하게 이해했는데 문제에는 전혀 적용해서 풀지를 못하겠는 등비급수랑 같은 느낌이네요. 나는 평생 당신에게 공감은 못하고 이해만 할 것 같아요.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많은 일이 있었다.


아빠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실망스럽게도. 이미 끝난 관계에 실망이라니, 결국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조차 미련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같은 성인이 되어  돌이켜본 아빠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약한 사람이라서 그 미련조차 남지 않게 되어버렸다. 같은 성인이 되어 바라본 아빠는 정말이지 별 것도 아닌 문제에 도망을 택한 사람이었으니까. 미련이 사라지자 아빠는 마음 속에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덕분에 삶이 윤택해지고 나는 복수심이 아닌 다른 긍정적인 마음들에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끝난 일에는 어떤 마음이든 빨리 털고 잊는게 가장 나를 위한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개를 집에 들이며 이전의 실패와 후회를 경험삼아 더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새로 사랑해야하는 존재가 생긴 이상, 지나간 사랑은 경험으로 삼을 수는 있어도 절대 미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두번의 연애와 한번의 썸. 각각 다사다난한 일이 있었지만 셋 모두 한번 끝이 난 관계는 어떤 이유로든 복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 할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앞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있어서인지 나는 언제나 떠나는 쪽에 있었다. 물론 한번에 끝내는 것은 어려웠지만, 미련을 없애야 내가 편해진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금방 해결되곤 했다.


미련을 남긴 상대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것을 해소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불편함만 안길 신호를 보내오는 것을 보며 왜 이형기가 가야할 때를 아는 사람이 아름답다 말했는지 이해가 됐다.


언제부턴가 이형기의 시가 진심으로 이해되고 공감됐다. 치기어린 마음으로 그 시가 재수없다 말했던 어린날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고, 이 또한 그가 말한 낙화 이후에 맺힌 열매가 의미하는 바였으리라.


수업 때 배운 시가 수년동안의 나의 삶에 녹아드는 것은 꽤나 진귀한 일이었다. 보통 학교에서의 배움은 이런 개념의 배움은 아니니까.


이형기의 낙화는 그렇게 가슴 한켠에 묻고 꽃을 피워내는 양분이 되었다. 시의 힘이었다. 문제지를 넘기며 몇백개를 보아도 전혀 알 수 없었던 힘.




“쌤 저는 다 괜찮은데 문학이 싫어요. 뭔소리를 하고싶은건지도 모르겠고, 이런걸 왜 알아야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해는 한다만, 결국 국어에서 시를 바라보는 형태는 정해져있어. 너보고 해석하라는 거 아니잖아. 정해진 틀을 알려주고, 그거대로 맞춰서 기계적으로 풀라고 하잖아. 뭘 느끼고 이해하려고 시도하지마. 시키는대로 안하니까 어려운거야.”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하며 수업을 이어나간다. 문제지에 이형기의 낙화가 등장한다.


“여기는 반어법. 그리고 이 부분은 역설법. 이 두개는 특히 눈에 띄면 바로 체크해야 한다고 말했지? 무조건 문제로 나온다고. 하강적 이미지를 사용중이고, 꽃잎이 지는걸 의인법으로 표현하고 있네. 명사를 이용한 마무리로 여운을 남기고 있고, 다 파악할 수 있지?“


인생의 전부를 녹여낸 이 시도 결국 문제집 속에선 기계적으로 체크하고 풀어내는 쓸모없는 시에 불과하다. 나는 그것을 장려한다. 고용된 나의 쓸모는 성적을 올리는 것이지, 시를 삶에 녹여내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대체 시같은 걸 왜 쓰고 왜 보는걸까요? 소설은 재밌기라도 하지 시는 그렇지도 않잖아요.”


“언젠가 너도 너만의 인생을 투영할 수 있는 시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 시는 수년, 또는 인생의 경험을 집약해놓은거니까.”


“쌤 그렇게 말하니까 완전 문학인같아요.”


“오글거렸어?”


“그런건 아니예요~!”


“그래그래. 얼른 집중해서 나머지도 풀자. 지금이 잡담할 때야?”


나는 오늘도 내가 아는 시와 다른 시를 가르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의 정도와는 멀리 떨어져있는 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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