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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류 Dec 02. 2022

쿠로미 덕후가 된 건에 대하여

수업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와서 문득 바라본 나의 자리가 너무 귀여워 보였다. 노트북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쿠로미 스티커, 쿠로미 얼굴 모양의 파우치, 가방에 달려있는 쿠로미 키링까지. 지나가는 사람이 본다면 자리 주인이 뼛속까지 쿠로미 덕후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방에 있는 7개의 쿠로미 인형들을 포함해서 이 모든 쿠로미 물건들 중 내가 구매한 것은 단 한 개도 없다. 내가 쿠로미 덕후라는 건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이다.


시작은 카카오톡 테마였다. 심심한 카카오톡 테마가 싫어 이것저것 둘러보던 와중에 쿠로미 테마의 보라색 색감이 마음에 들어 그것을 골랐다. 생긴 것도 귀여우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원래는 에스더버니, 마이멜로디, 몰랑이같은 핑크색 토끼류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나였지만 딱 한번 변덕을 부려본 것이었다.


어느날 언니가 일본에 가서 산리오 볼펜, 마이멜로디 인형, 쿠로미 키링, 쿠로미 파우치를 사왔다. 애도 아니고 성인 선물을 캐릭터 물건으로만 잔뜩 사오나 싶었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들어 잘 사용하고 다녔다. 역시 언니라 그런지 인형은 마이멜로디로 사온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의 옷장에는 내가 직접 사놓은 에스더버니와 마이멜로디 인형이 잔뜩 있었지 쿠로미 인형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집에 놀러온 친구는 옷장 위의 인형들을 인상깊게 보더니 며칠 뒤 쿠로미 인형을 사왔다. 내가 좋아할 것 같아 사왔다는 것이다. 마이멜로디와 쿠로미가 친구 격인건 맞지만, 왜 그곳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쿠로미를 사온 것인지 의문이었다. 어쨌든 나를 떠올리고 가져온 그 마음이 예뻐서 소중히 보관해두었다.


남자친구와 사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의 가방에는 에스더버니 1마리, 마이멜로디 2마리가 가방의 망에 넣어져 장식돼 있었다. 망의 지퍼에만 아주 작은 쿠로미 키링이 달려 있었다. 이걸 본 남자친구는 자신의 고향에 갔다가 날 위해 쿠로미 인형을 사왔다. 이번에도 전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건 핑크색 토끼들이었을텐데, 왜 이번에도 쿠로미가 나에게 온 것일까?

아무렴 어떤가,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준 선물이니 최고로 마음에 들었다. 그 쿠로미는 원래 있던 쿠로미 인형과 함께 장식해두었다.


과외학생이 산리오 캐릭터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의 가방을 보더니 선생님도 좋아하시는거냐며 방방 뛰었다. 그러더니 다음 과외 시간에 과외학생이 여러개의 산리오 키링을 책상에 올려놓더니, 나에게 하나를 준다고 말하며 쿠로미를 건넸다. 왜 헬로키티도, 마이멜로디도, 폼폼푸린도 있는데 쿠로미를 준거냐고 물어봤다. "선생님이랑 제일 잘 어울려서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워서 쿠로미 키링이 마음에 쏙 들었다.


어떤 날에는 생각 없이 친구를 만나러 갔더니 친구가 쿠로미 때문에 나에게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져왔다며 스티커를 건네왔다. 노트북이 심심해보였던 찰나에 괜찮다싶어 노트북에 붙여놓았다.


일본에 여행을 가는 친구가 단톡방에 각자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며 카톡을 보내왔는데, 나에게는 "넌 당연히 쿠로미 인형이지?"라고 말했다. 놀라운 건 정말 그럴 예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불과 2년전에 언니가 일본에 갈 때는 마이멜로디를 사다달라고 말했는데, 이제는 당연히 쿠로미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주변인들의 선물 공세에 어느새 내가 '쿠며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부턴가 내가 제일 좋아한게 마이멜로디였다는 사실조차 잊고있었다. 왜 주변인들은 나에게 그렇게도 쿠로미 상품들을 건넸던 걸까. 정작 나는 당시에 다른 캐릭터를 좋아했는데도 말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선물을 받는 것은 언제나 충만한 감정을 준다. 나를 생각하고, 나를 위해 그 물건을 사서 내게 가져오는 그 과정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들이 쿠로미를 보고 나를 떠올린다면, 그리고 그 쿠로미를 데려와 나에게 줄만큼 내게 필요해보인다면, 그러면 그냥 나는 쿠로미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도 좋다.


내가 쿠로미 덕후가 된 것이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한 것만 같다. 별 것 아닌 캐릭터가 나에게는 내 사람들이 주는 애정의 산물인 셈이다.


이 검고 귀여운 캐릭터가 주는 충만함에 쿠로미가 더 좋아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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