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남과 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류 Jul 29. 2024

2. 여자


3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여자와 남자는 부부 못지않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는 연애기간 동안 그들은 본가에 돌아간다던가 하는 일이 아니고서는 매일같이 붙어있었다. 대단히 로맨틱하고 특별한 데이트 같은 건 없었다. 그저 하루종일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어쩌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날에는 “우리 꼭 데이트하는 것 같다”며 시시덕거리곤 했다.


여자는 남자의 몸을 끌어안은 두 팔의 온기, 아스팔트 위 자전거의 덜컹거림, 흥얼거리는 남자의 목소리를 느끼며 스쳐 지나가는 수원 일대의 모습을 바라본다. 매일같이 돌아다녀 이제는 고향보다 익숙한 풍경이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굉장히 낯설다.


휴학 후 고시를 준비하겠노라 결심하니 더 이상 서울에 비싼 월세를 내고 살 이유가 없어졌다. 마침 집주인에게 이사비용을 대 줄 테니 집을 비워줄 수 있겠냐는 연락이 왔다. 1차 시험을 위해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이과 공부를 해야 했다. 남자는 과학고 출신의 이공계 학생이었으며, 그가 사는 동네는 집값이 매우 저렴했다. 일사천리로 이사와 학업이 이루어졌다. 남자는 무척이나 유능한 선생님이었으며, 좁아터진 집에서 탈출해 넓은 집에서 반으로 줄어든 월세를 내며 살게 되었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수원살이가 시작됐다. 짜 맞추어진 듯한 이 안온함은 폭풍전야일까 봄일까.


“손님 이 건물 맞으시죠?” 자전거를 세운 남자가 말했다.

“자동결제 맞죠? 안녕히 가세요.”

“저 이제 퇴근인데 저희 집에서 좀 놀다가실래요?”

“풉”


시도 때도 없이 상황극을 시작하는 여자의 모습에 당황하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능숙한 연기자가 자전거 손잡이에 팔을 걸치고는 대사를 치는 모습에 여자는 웃음을 터뜨린다. 함께 집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면 남자는 차를 꺼낸 뒤 전기포트의 전원을 켜고 바디로션을 챙겨 온다.


“누워봐 로션 발라줄게.”


여자는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향이 좋고 부드러워서 좋다. 그리고 남자의 집에 있는 차들은 모두 품질이 좋아서 맛이 훌륭해서 기쁘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나의 바디로션을 챙기는 당신이 바디로션을 바르지 않는 사람이라서, 가장 번잡스러운 보이차를 당연하게 꺼내는 당신이 설거지를 귀찮아하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여자의 머리를 땋는 일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이 땋아놓은 엉성한 여자의 머리카락을 보며 남자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있다더니 이럴 줄 알았다며 낄낄거리는 여자를 바라보던 지하철의 옆자리 할머니는 둘이 아주 보기 예쁘다며 한 마디를 건넨다.


남자는 이런 일상을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평범하고도 소중한 일상과 정다운 모습을 말이다. 여자는 계속해서 새로운 재미와 사건을 찾아다녔다.


지하철 안에서 무료해하던 여자는 머리땋기가 끝나자 이내 새로운 놀거리를 찾아 탐색하더니, 건너편의 할아버지를 향해 삼각형의 손모양을 만들곤 작게 "빔~" 하며 주문을 외웠다. 뭘 하는거냐 묻자 탈모빔도 모르냐며 남자를 나무랐다.


뜬금없고 무례한 행동에 당황스러워하던 남자는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머리가 벗겨진 다른 아저씨와 할아버지들을 손수 골라주기 시작했다.


오빠 나 진짜 사랑하는구나.. 중얼거리며 여자는 또 탈모빔을 날렸다.


어떤 날에는 모태신앙의 천주교를 가진 남자에게 여자는 신 사냥꾼이 되는 것이 자신의 꿈이라 말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신의 목을 잘라낸 인간이 되면 얼마나 멋있겠냐며 해맑게 웃었다. 남자는 여자가 이렇게 크게 웃은것이 오랜만이라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오빠 나 진짜 사랑하는구나...

이번에도 여자는 말했다. 여자의 사랑확인법은 다소 특이하고 이상하고 무례한 구석이 있노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는 다정을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원한 적이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녀에게 다정은 무척이나 가변적이고 순간적인 것으로, 그다지 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딱히 받고 싶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사람에게 그것들을 줄 필요성 또한 느끼지 못했다. 물론 다정을 욕망하는 사람에겐 누구보다 다정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력과 의지로 만들어낸 모습들일뿐이었으며 그녀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봤던 따뜻함을 흉내내는 것은 잘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진심이 되기는 어려웠다.


  언제부터였을까, 하루도 빠짐없이 다정한 말을 건네는 남자에게 스며들듯 묶여버린 것은. 다툼의 상황에서 끝없이 건조해지는 자신과 달리 온화한 말투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나, 아니면 기분이 나쁘다는 말 대신 슬프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였나, 아니면 매일같이 평생 함께하고 싶노라고 말하는 그 모습에서 진심을 느꼈을 때였나. 괜히 익살스러운 행동을 하며 괴롭히는 걸 즐기는 자신과 달리 다정에 다정을 더해 사랑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나.


진심이라는 것은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과는 달리 실상은 무척이나 얄팍한 것이어서 곧잘 변하고 소멸되곤 한다. 어제까지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나, 그러나 오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성립하기란 우스우리만치 쉬운 것이었다. 그래서 진심 따위야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와 같이 믿을만한 것도, 기대할만한 것도 아니라 치부하며 살아왔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당신의 진심이 변하지 않기를 호소하고 애원하는 사람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기분이다. 그렇게 논리적인 척, 이성적인 척을 하며 살아왔건만 여전히 자신의 전부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못 버렸던 것이다.

여자는 근래 가장 재미있게 읽은 “오로라”의 구절을 떠올린다.


‘어떤 믿음에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지. 너는 믿음에 깃든 이기심을 되새긴다. 당신을 끝까지 믿는다는 말은 나를 절대 배신하지 말라는 요구, 그러므로 믿음에는 이기심보다 더 큰 외로움이 숨어있다.‘


작가의 또 다른 작 “구의 증명”에는 이 구절이 있다.


’ 만약 내가 너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면 너는 술병을 치우는 대신 내 술잔에 술을 따라줘야 해. 우린 그렇게라도 같이 있어야 해.‘


스스로조차 그런 것은 정상적인 사랑이 아님을 알기에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마음들을 책 속에서 마주한 여자는 그곳에서 자신을 훔쳐보곤 했다.


모든 걸 내려놓으려던 순간에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남자에게는 무엇도 숨길 필요가 없었다. 처음에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다는 편안함이, 나중에는 자신의 멀쩡한 사랑이 꾸며내어지지 않아도 유지될 수 있도록 더 나은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다정에는 힘이 있었다.


어쩐지 여자는 그 다정에 기대어 바뀌어보고 싶었다.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