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ice Dec 01. 2024

내 단단한 정체성의 근간

나름 건강한 자아를 가졌다고 자부합니다만?

얼마 전에 동네를 산책하다가 작년까진 보이지 않던 빈 공터에 트리 시장이 생겼다. 

마치 미국에서 보던 것처럼, 산에서 직접 자른 진짜 크리스마스 트리를 파는 시장이었다.


그 순간 내 어린 시절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7살부터 10살까지는 시골에서 살았다. 


사실 내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의 9할은 그때였다.

 

뒤로는 산이, 앞으로는 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고, 아빠가 정자를 설치해 여름이면 친척들과 함께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목줄 없이 산을 누비며 뛰어다니던 사랑스러운 똥개 두 마리도 있었다. 닭장에서는 매일 아침 갓 낳은 계란으로 후라이를 만들어 먹었고, 회색과 흰색 토끼 두 마리에게 매일 과일 껍질을 먹이로 건네주곤 했다. (얼마나 잘 먹던지...)


엄마와 함께 마당 텃밭에서 수박, 오이, 고추, 상추, 토마토 등 각종 채소와 과일을 가꾸었다.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고 나가 고추밭 아래에서 기어다니는 달팽이를 관찰하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물론 한여름 땡볕 아래 잡초를 뽑아야 했던 기억도 있지만... 그해 수확한 무농약 수박은 비록 작았지만, 그 달콤함은 지금도 혀끝에 맴도는 듯하다. :)


마당에는 웅장한 크기의 나무가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전문가를 불러 크리스마스 트리로 장식해 주셨다. 

키 큰 아저씨가 사다리를 타고서도 겨우 꼭대기에 별을 달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거실에도 따스한 불빛을 내뿜는 트리가 있었다. 

밤중에 화장실에 갈 때마다 한참을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포근한 기분으로 잠이 들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어릴 적 기억이라 모든 것이 또렷하진 않지만, 기억은 행복한 추억으로 포장된다고 했던가. 

부모님께 참 감사하게도 내 유년기의 기억들은 대부분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


예를 들면, 여섯 살 때 수두에 걸려 병원에서 온몸에 약을 발라야 했을 때의 일이다. 무서워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도 있지만, 어머니께서 측은히 여기며 챙겨주시고, 평소엔 잘 사주지 않으시던 롯*리아의 밀크쉐이크를 사주셔서 택시를 타고 돌아오며 울면서도 열심히 마시던 순간이 떠오른다.


평소에는 아빠 회사 직원분께서 학교가 멀어 나와 오빠를 등교시켜 주셨고(부자집 운전 기사 그런거 아님...), 하교 때는 학원차를 타고 돌아왔다. 하지만 토요일이면 엄마가 늘 그 오래된 그랜저를 몰고 학교에 마중 나오셨다. 운동장 구석에 주차된 녹색 빛이 도는 검은색 그랜저 운전석에 계신 엄마를 발견하는 순간의 기쁜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토요일 선생님 종례가 끝나면 친구들이 불러 세워도 엄마한테 가고 싶어서 빨리 달려갔다. 오빠를 기다리는 동안 문방구에서 파는 말랑한 밀떡으로 만든 컵 떡볶이를 먹곤 했는데, 그때는 정이 많아 문방구 아주머니도, 어머니도 서로를 잘 알고 지내던 시절이었다.


이런 소소해 보이는 기억들이 내 마음속에 반짝이는 별처럼 생생하게 박혀있다. 

아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잊히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는 이 순간들이 이토록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테지만.

이런 소중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있었기에 나는 더욱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되어 사회의 삭막함에 지치고, 인간관계의 배신으로 상처받더라도, 

기본적인 윤리와 도덕을 저버리거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내 나라를 떠나 문화와 언어가 전혀 다른 낯선 땅에서 살면서 

온갖 시련을 겪고, 코로나로 인해 2년 넘게 귀국도 못 한 채 고립된 생활을 하며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도, 

부정적인 감정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때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이 어린 시절의 행복한 기억들이었다.


물론 비교가 일상이 된 이 날카로운 사회에서 내 정체성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 자체로 얼마나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를,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끊임없이 일깨워주기에 나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와 단단히 설 수 있었다.


비록 나는 부모는 아니지만, 

우리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이런 행복한 기억이 아닐까 생각한다.


서로를 비교하고 헐뜯으며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자신이 그 자체로 소중하고 행복한 존재임을 일깨워주는 기억들이야말로 

건강한 정체성의 근간이 된다고 믿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