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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선하 Jan 07. 2023

힘들지만 함께라는 건
그 어떤 기쁨보다도 큰 일

시 에세이쓰기 sophiaLuv23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런 날이 있다. 버티고 잘 버티다 더 이상 못이겨 무너지고 울음을 터뜨리게 되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은 그냥 몸이 지쳐서, 마음이 지쳐서, 아니면 그냥 날이 안 좋아서 일거다. 잘 지내다가도, 잘 견디다가도,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다가도 어느 날 털썩 주저앉게 되는 그런 날이 있다. 그러면 문득 무서워진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왔지? 또 다시 이렇게 마음이 힘들어지면 어떡하지? 미래는 불투명하고 예측할 수 없는데 내가 지금 발버둥쳐도 이뤄내지 못한다면 또 실패하고 또 좌절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마음이 요동치는 날에는 온 몸에 힘이 풀리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그 자체로 에너지가 바닥나곤 한다.


할 만큼 했는데, 최선을 다했는데도 원하는 결과를 이뤄내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은 한 인간의 자아를 처참하게 붕괴시킨다. 희망만을 가지고 앞만 보고 달리고 모든 것을 걸고 모든 것을 바쳤는데도 원하는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 겪어야만 하는 고통은 마치 심장이 신경치료를 받는 것과 같은 아픔을 준다. 그런 날에는 ‘신은 아마 내가 후순위인가 보다’하는 생각까지 하게된다. 그 여정 모든 순간마다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목표를 같이 한 다른 친구들이 먼저 그 꿈을 이루고 다음 단계를 밟는 것을 보면 괜히 마음이 더 불안해지고 조급해지고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다시 무너지게 된다. 그런 순간엔 난 항상 혼자였다. 혼자 이겨내야만 했고 지금도 혼자 이겨내고 있다. 가장 밑바닥인 순간에 온전히 스스로 그 삶의 무게를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이,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나를 가로막는다. 이러지 않으려고, 무너지는 게 두려워서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살면서 더 해야 할 일에만 매진하면서 달렸는데 힘이 딸려서 드디어 울 수밖에 없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린다. 


김수영의 풀을 보며 나는 위안을 얻었다. 나만큼 풀도 비가 몰아와서, 돌풍에 나부껴서 어쩔 수 없이 눕고 드디어 울게 되는 날이 있으니까, 날이 흐려서 더 울고 더 눕고 발밑까지 눕는 풀을 보고 나와 같이 시련을 겪는 동지 같아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배웠다. 풀이 볼 때마다 곧곧이 서있는 것은 풀이 무너지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단지 풀은 울어도 다시 더 빨리 웃고, 바람보다 더 늦게 누워도 더 빨리 일어날 뿐이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날이 흐려서 원치 않게 우는 날에는, 무너지는 날에는, 그 혹독한 현실을 받아들여 그대로 무너져 눕더라도 흐린 날이 걷히고 새로운 아침이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새롭게 웃는 얼굴로 하루를 맞이한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슬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좌절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아파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슬퍼하는 한이 있더라도, 좌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파하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슬퍼질수도 있다는 각오로, 다시 좌절할 수 있다는 각오로, 다시 아파할 수 있다는 각오로 용기를 가지고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아픔을 머금은 후엔 최대한 빨리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를 웃으면서 맞이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한 말 중 틀린 말이 있다. 내가 혼자 이겨냈다고 했는데 사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아픔과 슬픔을 온전히 겪고 견뎌내야 하는 건 오로지 나의 몫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모험을 하고 시련을 겪고 좌절을 하는 그 시간동안 부모님의 믿음과 격려 그리고 지원이 있지 않았다면 나는 꿈을 향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같은 처지에서 같은 마음으로 함께하는 인연을 만나 이 힘든 여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 엄청난 축복이자 다행이다. 그렇다.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일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단지 내가 어느 것에 더 집중하고 마음을 향하게 하느냐 그것의 문제이다. 풀은 돌풍에 나부껴 발밑까지 누울 때도 다른 풀들과 연대하여 같이 눕고 바람보다 일찍 일어날 때에도 다른 풀들과 손잡고 같이 일어난다. 그리고 새로운 아침의 태양이 떠 환히 웃을 때에도 같이 시련을 이겨내고 그 힘든 시기를 같이 했던 나와 닮은 내 옆의 친구를 보며 환히 웃는다. 그 시련자체는, 그 삶의 무게 자체는 온전히 나의 것이므로 나 혼자만이 짊어가야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와 같이 그 길을 겪는 또 다른 삶의 무게를 보며 서로 마음으로 의지하고 힘을 주며 같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땐 비록 가야할 길은 같아도 그 여정은 덜 힘들 것이고 덜 무너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도 더 웃고 힘이 날 것이다.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대학 들어오기 이래로 올해 처음 느꼈다. 나는 좀 외롭더라도 혼자인 것이 편하고, 혼자 시간을 쓰는 것이 효율적이고 사람들과 같이 다니며 감정을 소모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 뿐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혼자이면 더 자유롭게 다니고 시간도 더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하지만 올해 들어 같은 처지에서 함께 공부하고 같은 단계를 밟는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들과 하나 둘 인연을 맺으면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 혼자서 해낼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함께라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힘이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받아들였다. 내가 무너지는 날이 있듯 그들 또한 그렇고, 내가 아파하는 날이 있듯 그들도 그러며,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듯 그들도 스스로 그렇게 느낀다는 것을 서로 공유하고 서로의 일정을 공유하고 서로의 상황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힘이 된다는 것을 느꼈고 내가 비로소 그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한번 더 아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더 큰 의미를 덤으로 알게 되어서 감사하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도 가야할 길은 멀고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며 마음은 시시때때로 불안할 것이다. 나보다 앞서가는 친구들을 보며 위축되는 동시에 마음이 조급해질 것이며 노력보다 더딘 실력에 비참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길을 가야한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해 내느냐, 해 나가냐 하는 문제이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실패한 것, 모든 것을 걸었지만 이뤄내지 못한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되 나에게 새롭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 지금 인연이 새롭게 닿은 인연들에게 집중하며 하루하루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나가고 싶다. 내 현실이 아무리 비참해도, 도저히 즐거울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럼에도 난 이 순간에도 내 인생을 사랑하고 싶다. 좀 더디고 좀 느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고 싶다. 앞으로의 내가 수많은 시련과 굴곡에도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법을 익히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나아가길 바란다. 풀들이 동풍에 나부껴 흐느껴 울더라도 다시 일어날 땐 그 곁의 풀들에게 환히 웃듯이, 나도 언젠가 이 길고 길은 터널을 지나면 같이 빛을 보게 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환히 웃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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