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적 논리를 넘어서 나에 대한 이해로

데미안

by 윤선하

선과 악이 공존하는 신인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하고 카인의 후예가 되어야 한다. 처음엔 자칫 이도교처럼 들리는 데미안의 직설적인 발화에 거부감을 느껴 한동안 데미안 책을 멀리했다. 그리스도교인 나에게 성경을 비약하는 듯한 질문을 거침없이 내던지며 내 안의 신앙 체계를 혼란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명작으로 회자 되는 데는 인간 본성의 심연을 울리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시 펼치며 그 무엇의 의미를 이해하고 데미안이 그렇게 말한 의미를, 그 숨겨진 뜻을 알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아래 글을 통해 데미안을 이해하기 위해 내 사고의 틀을 깨며 새롭게 깨닫고 이해한 것들을 남긴다.





조로아스터교와 카인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표면적으로 봤을 땐 유일신인 하느님을 배교하고 다른 신을 숭배해야 한다는 데미안의 강한 외침에 강한 반발이 들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는 바로 우리 자신을 상징한다. 조로아스터교가 선과 악이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내재되어있는 모든 생각과 감정을 부인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혼재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며 그 사실에 지레 겁먹고 회피하지 말고 전면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처음엔 데미안의 교육법에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 본래 악하고 약한 존재라면 우리를 잘 보호해 주시고 이끌어주실 하느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라면 여기서 하느님을 윤리적, 도덕적 기준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그 본 뜻이 ‘나의 주체 없이는 신과 함께 할 수도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없다’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싫어도 기꺼이 헌신하는 마음으로 행한 일이 결국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한 일들을 되새겨봤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선행은 하느님이다라는 이론이 나로 하게끔 선행에 압력을 넣고 선행을 하지 못한 나를, 때로는 죄를 지은 나를 더 죄책감에 이끌리게 하고 그로써 그분과 더 멀어지게 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작은 죄도 지으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이 나를 얽매고 진정성없는 모습을 보이게 만든 것이다. 아벨과 카인, 빛과 어둠, 선과 악의 이분법에 얽매여 나 자신이 카인이, 악이 되는 두려움에 갇혀 있었고 조로아스터교는 나의 이런 틀을 지적했다. 그는 나와 세상을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성장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건네주었다. 개인의 복잡한 스펙트럼을 이해하고 그러기 위해 어둠이 혼재되어 있는 내면을 직면해야 할 필요성을 각인시킨 것이다. 내안에 내재되어있는 선행에 대한 의무감, 진정성 없는 허울들을 비판하고 내가 좀 더 현재 나의 감정과 직면한 상황에 집중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것을 조언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씌운 프레임을 조금씩 깨고 나의 나약하고 진실된 모습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이와 관련해 책에서 ‘자기 자신의 판관이 되라’는 말이 마음에 꽂혔다. 내가 하느님의 뜻이 혹은 사회의 시선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전에 나 자신이 그것에 대해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정직하게 되묻는 나 자신의 판관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가 빛과 멀어지는 게 아니다. 전에는 어둠과 나약함의 잔해가 남아있는 마음을 이해하는 게 나를 더 어둠으로 번지게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스스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길 꺼려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 만이 홀로 설 수 있고 성장은 외로움을 수반한다고 위로한다.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이해의 시간을 거치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께, 또는 사회적 사건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초반에 데미안을 외면하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나에게 큰 행운이다. 그를 이해하는 과정은 곧 나를 이해하는 과정이었음을 글을 쓰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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