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에 케네디 공항에서 내리면 처음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맑은 공기였다.
청량감은 서울과 매우 달랐다.
택시를 타고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Flushing으로 가는 동안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것은 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도시에 나무가 많아 그늘이 크고 공원도 동네에 여러개가 있어 인상적이었다.
Flushing은 작은 한국이다.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다. 평생 한국말만 사용하고 살아도 문제가 없을 만큼.
지금이야 k-pop 때문에 더할 테지만.
영어가 서툴고 막 뉴욕에 도착한 사람에게는 반가운 동네이다.
한국 사람이 주인인 집에 방 하나 빌려 살면 더욱 그렇다.
주인아주머니나 할머니는 엄마처럼 잘 챙겨주기도 하고 종종 불러내어 음식을 같이 나눠 먹기도 한다.
오래전, 뉴욕에서 내가 살던 집에는 세 사람이 각자 방 하나씩을 얻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주인집 할머니는 60대 초반이셨는데 한글을 읽지 못하셨다. 반면에 내 옆방에 사시는 할머니는 80대 초반 할머니셨는데 성품이 남 달라 보였다.
이제 막 뉴욕에 와서 어리바리한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신 할머니이기도 했다.
지금은 세월이 너무 흘러서 아마도 돌아가셨을 것이다.
한문으로 격식을 갖춰 할머니의 사돈어른께 편지를 써서 보내기도 하시고 종종 왜소한 몸집에 맞춰 손바느질로 옷을 수선해 멋지게 입고 교회에 다녀오시기도 했다.
뉴욕의 한국교회는 한국의 교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배가 끝나면 떡을 포장해서 주곤 했는데 할머니는 그 떡을 가져와 나를 챙겨주었다.
할머니의 아들은 내과 의사였고 다른 주에 살고 있었다.
한국 사람 한 명 없는 고립된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손주들과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것은 더욱 할머니를 힘들게 했을 것이다.
게다가 저녁에 퇴근해 들어오는 아들과 며느리가 얼마나 할머니와 살가운 대화를 했을까도 싶다.
나는 할머니를 빠삐용 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들이 사는 집에서 한인타운으로 탈출에 성공했으니까.
할머니도 그런 말을 싫어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집은 이층집이었는데 텃밭도 있어서 할머니는 주인 할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조그맣게 상추랑 고추 깻잎을 기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채소들로 상을 차리고 나를 불러내어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다며 비빔밥을 만들어 나눠 먹기도 했다.
내가 지금 이 할머니를 기억해보는 것은 뉴욕에서 처음 만난 분이기 때문이다.
정말 내 할머니 같았던, 나의 첫 번째 룸메이트...
할머니의 과거의 삶은 박경리 소설 ‘토지에 나오는 서희’ 와 매우 비슷했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대충은 알게 되었지만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긍정적인 성품 때문인지 억울하게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나머지 삶을 재미있고 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젊은 사람의 패기가 아니라 할머니의 당당함을 부러워 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1달러짜리 지폐를 인도 사람이 운영하는 편의점에 들어가 4쿼터로 바꿔 달라고 부탁하고 그 동전으로 버스를 타고 볼 일 보러 가는 모습도,
약국에 가서 두통약도 모기약도 사 오시는 모습이 멋져 보였었다.
할머니는 전통적인 속 바지를 챙겨 입으셨는데 고무줄이 녹아 늘어져서 바꾸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어디 가면 살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아웃렛 매장으로 갔다.
2층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보니 예쁜 스페니쉬 아가씨가 다가와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고 할머니는 영어로 표현을 못 하니까 속바지 고무줄을 잡아당겨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이것’이라고 가리켰는데 빤히 쳐다보던 아가씨가 알았다는 듯이 ‘아하’ 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가씨는 커다란 가위를 가지고 와서 할머니의 고무줄을 싹둑 잘라버리고 말았다.
할머니는 깜짝 놀랐지만 뭐라고 말을 못 하고 그냥 속바지를 움켜쥐고 집으로 오는 길에 ‘고무줄이 영어로 뭐더라, 뭐더라….’ 곰곰이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주인집 할머니는 바퀴벌레약을 사러 약국에 갔는데 어떻게 말을 할 줄 몰라 마치 단어를 몸짓으로 맞추는 퀴즈 쇼에 나온 것처럼 몸으로 설명해서 사 왔다고 거들었다.
할머니가 두 손을 머리위에 대고 검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바퀴벌레 안테나를 흉내낼 때 우리는 서로 쳐다보며 깔깔 웃었다.
그렇게 한 가족처럼 몇 달을 같이 살았었다.
노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이 있는 날에는 빠삐용 할머니가 주인집 할머니와 아래층에 사는 다른 할머니들을 챙겨서 데리고 가곤 하셨다.
아래층 할머니도 한글도 영어도 모르니 빠삐용 할머니가 특별히 실수하지 않게 챙겼다.
그렇게 식사하러 다녀온 세 할머니는 주인집 거실에 모여 앉았다.
빠삐용 할머니는 아래층 할머니의 실수를 지적하고 계셨다.
하며 웃으셨다. 두 할머니도 따라 웃으며 빠삐용 할머니에게 고마워하며 말했다.
나 같았으면 영어로 대화도 안 되면서 감히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당당함은 거침이 없었다.
이제 막 랭귀지 스쿨에 등록하고 다니던 나에게도 할머니는 손주 숙제 검사하듯 저녁이 되면 뭘 배웠냐고 묻기도 하고 할머니 앞에서 배운 것을 영어로 말해보라고 시키기도 했다.
지나고 보니 빠삐용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던 시간이 참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그래야 미국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예의를 갖춰 존댓말을 하시고 사자성어를 즐겨 쓰시던 빠삐용 할머니가 그리워진다.
맞다. 맞서봐야 쟁취할 수 있고 쟁취해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다. 나는 어쩌면 그 시절 겁이 나서가 아니라 창피해서 주저주저하지 않았을까?
마치 아메리칸처럼, 완벽한 영어가 내 입에서 주어 동사 갖춰서 술술 나올 때 까지 기다리느라고.
30년이 지난 지금, 할머니가 살아계셔서 나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