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늙기 싫어 걱정하는 당신에게
요즘 나의 며칠간 최대 고민거리는 '노화'였다.
노화의 사전적 의미란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체의 구조와 기능이 점진적으로 퇴화되는 것을 의미' 한다.
노화라니. 20대에는 나에겐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먼 나라 이웃나라 같은 단어였고 30대에 진입한 지금은 실질적인 대비를 세워야 하는 곧 다가올 미래가 되어버린 그 서글픈 두 글자 '노화'
흔히 모든 사람들이 가장 노화를 표면적으로 느끼는 것은 외모가 아닐까 싶다. 하루하루가 유행의 트렌드를 쫓아가야 살아남는 젊은 감각이 필요한 패션업계에서 몇 년째 근무 중이라 그게 더 실감이 된다.
물론, 나 정도면 동안이지라는 생각도 있었다. 어딜 갈 때마다 내 나이를 말하면 사람들이 "어머, 진짜요? 저는 25 살인줄 알았어요."라고 말해주시는 덕분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화'는 나와는 아직 먼 이야기 같이 느껴졌었는데, 과학학술지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된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의 논문에 따르면, 과학자들이 알아낸 노화 촉진 시기는 34살, 60살, 78살이라는 노화주기에 대해서 쓴 글을 보게 되었다. 만 34살이라고 하면 불과 3-4년도 안 남은 시간이라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노화'에 대한 강박이 몰려왔다. 서둘러 인터넷에 노화에 대한 글을 찾아보았다. 제목이 여자나이 34, 35이라는 글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도 이번에 한국에 들를 때 얼굴에 뭘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며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나는 영국에 있는 동안 내가 일상생활에서 과연 동안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들 중 어떤 것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시중에 나와있는 카더라 보다는 의사들이 쓴 의학논문들을 위주로 찾아보았는데 공통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의학적으로 이야기를 한 느낌이었다.
이를테면 선크림을 매일 바르고 바른 자세와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하는 것. 그리고 적정한 체중유지, 가벼운 운동, 소식 등의 여러 가지 권고사항이 있었지만 그중에 모든 의사들이 가장 첫 번째로 조심해야 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노화를 촉진시키는 호르몬이 분비가 되기 때문에 최대한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이 가장 노화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근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일까? 늙는다고 생각만 해도 이렇게 벌써 혼자 스트레스를 받으며 노화를 촉진시키고 있는데.
혼자 갑자기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서글퍼져, 멍하니 창문 밖을 보고 있었는데 3년 전 파리로 출장온 엄마를 만나러 파리로 가 단둘이 파리 밤거리를 걸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의 나는 곧 30대가 얼마 남지 않은 이십 대의 후반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이 이십 대 초반인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어버렸나 싶었다. 혹시나 내가 20대 초반 같은 마음에 머물러 소위 말하는 '나잇값'이라는 걸 못하는 피터팬 증후군이라도 걸려버리거나 노망이 나게 되면 어쩌나 싶었었는데 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엄마는 엄마가 몇 살이라고 생각해?"
"엄마는 엄마가 아직도 20살 같아."
놀라웠다. 엄마는 자식도 낳고, 커리어도 하며 게다가 많은 삶의 굴곡을 겪었을 텐데 근데도 엄마가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엄마가 어떤 소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엄마의 얼굴은 정말 20대 초반같이 설레 여보였다. 그런 엄마를 보니 다시 한번 엄마는 그저 '우리 엄마'가 아닌 나와 같은 '여자'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엄마가 아직도 어린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다 보니 자꾸 이것저것 하고 싶고 예쁜 옷도 입고 싶고 꾸미고 싶어지고 아빠와도 더 잘 지내고 싶어 진다고 했다. 엄마와 그렇게 파리 밤거리를 걸으며 여러 이야기를 하고 나니 우리의 30살에 가까운 나이차이는 어디 가고 그저 같은 주제에 까르르 웃는 두 여자만이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늦은 나이에 유학을 준비할 때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학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이제 20대 초반일 텐데, 일찍이 커리어를 먼저 시작하고 들어간 나는 20대 중반이 조금 지난 나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온 대학교에서 영국에서 많은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며 한 번도 나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외국은 나이를 잘 묻지 않고 특히나 여자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실례이다. 생각해 보면, 내 주변에 나이를 물었던 사람들은 모두 유학온 아시안 나라 출신의 유학생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아직도 지금 나랑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의 나이를 모른다. 추측건대 20대 초중반이리라. 우리에게는 거의 7-8년의 나이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한 번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나는 서로 같은 고민을 하는 사회초년생일 뿐이기 때문이다. 같이 직장과 이직을 고민하고 오르는 물가에 그렇지 못한 나의 월급에 (영국인답게) 자학적인 가난배틀을 하며 웃어넘기고, 연애문제에 대해서 같이 호들갑을 떨며 가끔 술을 마시며 서로를 응원해 주는 친구. 인생선배가 아닌, 언니나 누나가 아닌 그냥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끼리의 만남이다. 여기 친구들과 그렇게 지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흔히 느끼는 '나이차이'는 과연 정말 나이 때문일까 아니면 환경 때문일까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유학을 오고 난 뒤, 나는 이것이 단순히 사고가 다른 외국 사람들과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까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는데 이 의구심이 풀리게 계기가 되는 일이 있었다. 우연치 않은 기회로 한국에서 반말을 하는 모임에 참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모임의 룰은 그 사람이 누구든, 뭘 하든 , 서로 반말을 하며 이름을 부르고 친구처럼 어울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처음에는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했었다. 반말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떠들었다. 모두 얼굴을 보지 않고 편안하게 이야기해서 그런지 금세 친해졌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얼굴을 보게 되는 사이가 되었는데 그곳에는 40살의 아저씨도 계셨고, 한두 살 많은 중형 유튜버도 있었으며 또 20살 대학 새내기도 40살의 언니도 있었다. 우리는 여전히 지금도 서로에게 반말을 쓰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언니라는 호칭이 사라진 40살의 그녀에게 나는 동갑내기처럼 장난을 치고 그녀의 조언도 듣고 응원도 들으며 서로를 응원한다. 이제 군대에 들어간 20대 초반의 남자애와도 막역하게 지내며 그의 연애상담을 도와주다 보면 나도 옛날 생각이 나 더 응원하게 된다. 나이라는 한 커플을 벗기고 나면 우리는 그냥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차이를 만드는 건 사실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 때문 인건 아닐까?
내가 처음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도, 다들 대학을 가기에는 '늦은 나이'라고 했었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다들 도피성 유학이라는 둥, 이제는 돈을 모아서 시집을 가야 할 때라는 둥 가족이나 친구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다니, 설렘반 착잡함반으로 시작했었던 유학생활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 스스로의 커리어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바꿀 수 있었으며, 나의 가치관과 생각 전체를 더 넓혀주는 나에게는 성공적인 '개안'의 유학이 되어주었다. 내가 겪었듯 이 '시작점'에도 나이에 따른 사회적 규범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는 우리에게 20대 초반은 이래도 된다라고 한다. 그리고 20대 중반에게는 여기까지는 해야 한다 라는 가이드라인을 준다. 그런데 20대 후반부터는 이 정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충고를 주기 시작하고 30대는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경고를 준다. 30대 중반은 이미 늦었다라며 핀잔을 주기 시작하고 30대 후반은 낙오된 것과 다름없다는 사회적 분류를 정해놓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각자 무언가의 가능성을 자의적으로나 타의적으로 꺾어버리게 만든다. 이때까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과연 누가 정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에 우리 사회가 '70살까지만 대학교 가면 된다'라는 사회였다면 우리는 지금 모두 다 엄청난 사회적 성공과 커리어를 이룬 초천재들이 아닌가?
물론, 사회적 규범이나 우리가 도덕적으로는 지켜야 하는 일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런 것들 외에 사회의 질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남들이 정한 기준선 때문에 시작부터 포기해 버리거나 스스로의 다양성을 포기하고 낮추면 혹시나 더 높게 날아오를 수 있는 멋진 나 자신의 한계를 정해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사회적 인식이라는 것에만 내 인생을 맞추며 눈치 보며 살기에는 너무 서글픈 것 같다. 막말로 정말 한번 사는 인생인데.
좀 더 노화에 대한 글을 찾아보던 중 어떤 여자분이 올린 유명한 글이 있었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이 나이에 맞지 않는 너무 안 어울리는 옷과 화장품에 그것을 모두 갖다 버렸다는 이야기. 그리고 거기에 공감하는 수많은 댓글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옷장들을 한번 보며 나도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거기엔 버릴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옷을 입을 때 나이에 맞는 옷차림을 해야 한다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패션에 가장 민감한 패션업계에서는 오히려 나이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에게 더 박수를 쳐준다. 패션은 절대 젊은 세대만이 가지고 있는 트렌디한 감각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숙련자들이 만들어내는 트렌디한 감각과 그들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는 세련미와 노련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입고 싶은 옷을 입는 게 뭐 어때서?
가끔 불란서에 거리를 걷다 보면 백발에 칼단발을 하고 새까만 선글라스 그리고 풀 레드립을 하고 다니시는 할머니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 할머니 왜 저래 노망 나셨나 봐.라고 하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이게 프랑스지 하며, 그녀의 자유로움을 모두 선망할 뿐이다. 그녀에게 '나이 듦'이란 그녀의 인생을 흔드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녀의 인생에 넣어진 그저 또 하나의 요소가 아닐까?
그리고 나의 눈도 조금씩 달라지리라. 내가 20살 때 좋아했던 남자 배우의 얼굴과 지금 좋아하는 남자 배우의 얼굴이 달라지듯 취향이란 건 언제나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신 지금 당신 자체를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인테리어를 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거 같다. 프랜치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엔틱 하우스에 귀여운 핑크 바비 가구들만 채워 넣으면 당연히 이상하겠지만 그걸 또 조화롭게 적당히 엔틱 하게 적당히 핑크로 꾸미는 것도 본인취향이며 어차피 그 집은 당신의 집이고 당신의 집은 당신에게 가장 편안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집이 우리 집과 다르다고 손가락질하거나 이상한 눈초리를 보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그 집 사정이니까. 나는 오히려 그렇게 집을 꾸밀 수 있는 용기와 열정에 박수를 쳐주고 싶고 그런 집들이 앞으로도 더 늘기를 바란다.
내가 어떻게 한들 나의 겉모습은 변하게 될 것이다. 분명히 나이가 들어갈 것이고 나는 최대한 그 나이 듦이 늦게 오길 여전히 바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스스로 내 속까지는 벌써 나이 든 사람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싶지 않다. 최근에는 리라도 배우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내 생각들을 정리해 브런치에 글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내가 40살에만 할 수 있는, 50 살에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한편으로 기대가 된다. 80세 꼬부랑 할머니가 되면 백발에 꼭 선글라스를 끼고 발 편한 가죽부츠를 신고 커피를 마시고 앉아있으리라는 다짐도 함께.
그렇기에 나는 노화를 조금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내가 노화를 걱정하면 걱정할수록 스트레스로 인한 노화를 부추기는 셈이니까. 영어에서는 나이 든 사람들에게 'old' 라고 표현 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하다. 그래서 그들은 'aged' 라는 표현을 대신 쓴다. 그러고 보면 요즘 유행하는 스테이크 중 dry aging beef라고 있는데 이 드라이 에이징 소고기는 온도와 습도를 최적화시킨 냉장고에서 숙성된 프리미엄 소고기이다. 그리고 이 소고기는 숙성기간이 길수록 더 부드러우며 이런 맛이 소고기에서 날 수 있는가 싶을 정도의 풍미를 주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갓 잡은 신선한 소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맛도 분명 있을 테지만, 숙성기간이 길어질수록 깊어지는 오직 'aged'된 인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우리 인생의 멋진 풍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