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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세 Jul 14. 2023

나는 밝은 사람이야 -2

번아웃? 우울증? 그 애매한 영역.







나는 일단 서서히 외부로부터 단절되기 시작했다. 원래 프리랜서라 일이 없으면 집에 있는 게 일상이긴 했어서 처음에는 그냥 내가 좀 게을러졌나 보다 싶었다. 게다가 남편 역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이라 우리가 평일에 외출이 없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남편과의 데이트나 모임 그리고 외식조차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마치 코로나의 락다운이 다시 시작된 것처럼 집에서만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느끼지 못하게 우울증은 점점 악화되었다. 가장 큰 예로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가끔 친구들을 만나러 밖을 나갈 때가 있었는데 그런 남편을 웃는 얼굴로 배웅해주고 나면 혼자 침실에 다시 들어와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나도 내가 왜 눈물이 나고 이렇게도 서글픈지는 몰랐지만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내가 너무 이상해서 남편이 집에 늦게 들어오길 바랐었다. 이런 이상한 몰골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이상한 사람처럼 이불에 누워 몇 시간을 울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남편친구들 뿐 아니라, 내 친구들까지도 만나는 게 버거워졌다. 그때는 그냥 내가 사람 만나는 거에 귀찮아졌나? 하고 집에서 노는 거 좋아하는 남편을 닮아가나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귀찮은 게 아니라 버거워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었던 것 같다. 




실제로 그즈음에  급격하게 폭식을 하기 시작했고  일 년도 채 안돼 15킬로가 넘게 쪄버렸다. 패션학교를 졸업해 패션업계에서 종사하고 있는 멋 부리기 좋아하는 나에게는 그것은 마치 나의 소셜라이프의 종지부를 찍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 제일 뚱뚱해져 버린 내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뭘 입어도 예쁘지 않았고 들어가지 않았고 점점 펑퍼짐한 옷들만 찾게 되었으며 나중에는 그런 내 모습이 너무 꼴 보기 싫었다. 당연히 옷 입을 스트레스와 걱정에 점점 더 밖에 나가기 싫어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프리로 들어오는 일은 또 꼬박꼬박 나갔다. 누구도 나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강요는 하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이 가정에서 떳떳한 1인의 몫은 해내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이 있었다. 더욱이 이렇게 이상해져 버린 나를 말없이 챙겨주며 고생하는 남편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세상 최고의 사람인 줄 아는 그에게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됐더라도 앞으로라도 더 나아지는 모습을.  하지만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할수록 점점 더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난 전혀 내가 우울증일 거라는 생각 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때 남편이 나에게 처음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은 나보다 훨씬 더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것에 대한 편견도 없고 또, 남편의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에 남편은 나의 우울증을 '감기'대하듯 대해주었다. 너는 지금 아픈 환자니까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다며 나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치료와 상담을 권유했지만 나는 솔직히 그때까지도 나라는 사람과 우울증을 연관시킬 수가 없었다.




남편이 잠들고 그날도 여전한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인터넷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럴듯해 보였다.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친한 친구들에게 나의 증상을 이야기해 보니 다들 ' 번아웃이 왔나 보다'라고 했었고  나 역시도 아 그냥 번아웃이 온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상상 속 우울증 환자들은 마치 오늘내일 당장이라도 삶을 포기할 것 같은 사람들의 이미지였으니까. 




번아웃이 왔으니 잠깐 쉬면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편한 마음으로 이것도 더 나아가기 위한 투자다라며  일도 일주일 쉬고 남편과 훌쩍 시골 섬으로 가서 며칠을 지냈었었다. 남편이 바득바득 우겨서 간 거였지만 내심 가니 좋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때 당시에만 해도 조금 기분이 나아져 한동안은 돌아와서 힘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지만 그것 또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나는 다시 그 무기력한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남편은 애쓰는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 거렸지만 남편 스스로도 우울증과 나르시시즘이 있는 어머니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더 이상의 ptsd를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과는 달리 뭘 하든 무기력하고 할 이유가 없이 느껴졌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전날 밤에 계획했던 일들은 그다음 날 아침이면 하기 싫다로 변해있고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는 이유를 몰랐다. 이렇게 게을러진 내 모습을 보니 실패자 같아서 더 자괴감에 휩싸였다. 나는 이렇게 이대로 쭉 실패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걸까? 나는 어차피 이렇게 나태한 안될 인간이었나? 그런 생각들은 나를 더 잠 못 이루게 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스트레스라도 풀고 싶었지만, 나의 친한 친구들은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 모두 돌갔고 그 외에 새로 사귄 친구들은 있었지만 외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소수의 사람들만 제외한다면 다들 본인의 인생도 어디로 흘러갈지 몰라 여유가 없어 보였다. 나조차도 그러하였고. 


 예전에는 이 여유가 없는 사람들끼리 만나면 서로 버팀목이 되어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여유가 없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것과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남을 도우며 행복해하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나에게 그런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더 어려웠고 그런 곳에서부터 오는 상실감과 생채기는 나를 더 아프게 했었다. 



 나중에는 점점 심해져 어느 시골로 가서 남편과 그냥 단둘이 살고 싶었다. 친구들이 놀러 가고 싶어!라고 해도 멀어서 못 올 정도의 이유를 만들 시골. 그게 이유였었다. 주말마다 친구들을 불러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웃고 떠드는 게 낙이였던 예전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그렇게 또 그로부터 내가 나를 외면하는 시간을  어영부영  3개월이라는 시간을 더 보내고 나서야, 나는 나를 바로 마주 봐야 할 이유가 생긴 것 같았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어제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자살'에 대한 영상이 우연히 나의 알고리즘에 떠서 몇몇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자살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감이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그래도 자살을 어떻게 하나? 무섭지 않나? 극단적으로 정신이 아프거나 나약한 사람들이 하지 않을까 등등 그런 생각들을 해왔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막연히 죽고 싶다가 아니라, 늘 마음속에 저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나의 이성이 조금 느슨해지는 그 순간 충동을 못 이기게 되면 그럴 수 있는 일이구나.



 그걸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내가 놀라웠다.



 바로 그 전날 오랜만에 간 촬영장에서 일을 하던 도중 호흡이 가빠지고 더 이상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촬영장을 빠져나가 가만히 서서 하늘을 봤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유난히도 예쁜 영국 하늘을 보니 앞으로 남아서 다시 일해야 하는 시간이 끔찍해졌다. 30분조차 더 저 안에 있을 수 없을 거 같은 그런 기분을 느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졌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과 함께 다시 돌아가서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일조차도  마치 내가 엄청난 일을 하는 것처럼 가슴을 억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아무렇지도 않게 저녁에 친구 생일 파티에 갔다. 

그곳에 나는 마치 가면무도회를 하고 있는 것처럼 웃고 떠들며 다시 상실감에 빠져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마침내 나를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나는 괜찮지 않고 근데 괜찮지 않은 게 괜찮다. 그냥 나는 치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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