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선택이 아닐지라도
현재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끝으로 나는 회사를 떠난다.
기획자로 전향 후 첫 회사였으며, 햇수로 4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곳이다.
사실 이 회사 입사 후 기획 경력이 1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운영에 장기 투입을 시키는 바람에 퇴사를 할까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운영이라도 잘해보자 하는 마음에 꾹 참고 만 3년을 넘게 다녔다.
다니면서 배운 것도 많았고 업계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앞으로 몇 년 더 다녀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그 다짐은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그 시작은 프로젝트 투입 후 이틀 뒤에 진행했던 첫 전체 회의가 끝난 후였다.
2시간이 넘는 회의 시간의 내용을 회의록에 남겨야 하는 임무를 받았다.
사실 나는 운영과 고도화만 해봤었기에 회의록을 작성할 일이 없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회의록을 처음 작성하게 되었는데, 그 회의록을 시작으로 나는 이 프로젝트 아니 이 회사와 이별할 준비를 시작했다.
요약을 제대로 못한 나의 실수로 인해 PL과 나는 PM에게 크게 한 소리를 들었다. PM은 화가 많이 나셨는지 얼굴이 붉어질 정도였다. 그 이후로 PL은 나를 불러 1시간 가까이 ‘너 왜 그래? 뭐 불만 있니?’라는 소리를 시작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것인지 나는 거의 눈물 흘리기 직전이었다. 욕만 안 했을 뿐… 그때 들었던 말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회의 사건이 있기 전 날, PL은 나에게 정보구조도(이하 IA)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범위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몰라서 PL에게 물어봤던 것이 화근이었다.
“너 내 말 못 알아듣니? 당연히 우리가 하는 범위만 작성해야지. 방금 네가 한 말 소름이 끼친다.”
주눅이 들어 바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자리로 돌아가 정보구조도를 작성했다. 기존 시스템 고도화와 운영만 해왔던 나에게 처음부터 작성하는 정보구조도는 처음이었다. 집에서도 연습했었기에 신중하게 작성하여 전달했다. 그리고 나는 PL에게 큰 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프로젝트 팀원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 도대체 뭘 할 줄 아는 거니?
- 내가 어려운 거 시켰니?
- 무지성으로 일 하는 거 같은데, 생각이라는 걸 해.
난 내가 정보구조도 하나 제대로 작성 못하는 기획자라는 현실에 좌절감과 함께 수치심이 몰려왔다. ‘난 기획이랑 거리가 먼 것인가? 나 같은 게 기획자라고 하는 게 맞을까?’라는 진지한 자아 성찰을 시작했다.
퇴근 후 집에서 생에 처음으로 맥주가 아닌 소주를 들이켜고 울면서 잠이든 날이었다.
회의록으로 혼이 난 뒤 다음 날. PL이 나를 불렀다.
“앞으로 내가 너에게 업무 지시를 할 일은 없을 거야. 말 그대로 업무 배제야. 모든 회의에는 참석하지 마. 대신 PM이 시키는 일만 해.”
그리고 나에게 지시가 내려온 일들은,
1. 출퇴근 시간 프로젝트 팀 보안점검 확인
2. 회의실 예약하고 보고하기
3. 회의 시작 전 회의실 빔프로젝터 켜놓고 회의자료 셋팅하고 나가기
4. 출근 시간 기획팀 사람들 PC 본체 켜놓기
5. 보안 캐비닛에 보관된 기획팀 사람들 태블릿 미리 자리에 올려놓고, 퇴근 때는 업무 다이어리와 함께 수거해서 잠그기
6. 부연 설명 없는 타사 레퍼런스만 캡처해서 PPT 파일로 전달하기
7. 참석하지 않는 회의의 녹음 파일만 듣고 회의록 작성하기
이 일을 한 달이 넘게 했고 곧 철수를 앞두고 있다. 내가 투입되는 총기간은 2개월. 특히 제일 심적으로 힘들었을 때는 참석 배제 당한 회의의 녹취록만 듣고 회의록을 써야 했었던 것… 회의에 참석시켜주세요. 제발…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느리다는 것. 당일에 줘도 느리고, 두 시간 뒤에 준다 해도 그게 두 시간씩이나 걸릴 일이냐며 화를 내는 사람들. 이 사람들에게 나는 일 못하는 거북이였다.
이 외에도 좀 더 있었지만, 다 적기엔 계속 생각이 나서 힘들어질까 봐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괜찮을 텐데 왜 퇴사를 하냐는 의문들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내 팀원 들게 너무나 지쳐버린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 역시 PL이 나에게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 극 초반, 회사를 이미 떠나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때부터 퇴근 후 나는 포트폴리오 작업에 매진하였고, 여러 공고에 지원하였다.
경제가 힘든 상황이라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는데, 결국 사람 싫은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안될걸 알아도 정신없이 지원했고, 퇴근 후 면접을 보느라 늘 집에 늦게 들어갔다.
결과는 네 곳의 회사에 최종 합격 했고, 조건과 함께 내가 성장할 수 있는 회사와 잘 협의가 되어 곧 입사를 앞두고 있다.
내가 쓴 글을 보고 지독한 회피형인가? 폐급이 지금 자기 주제 생각 못하고 글 쓴 건가? 하고 느껴진다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말하자면 나는 이 프로젝트 전까지 업무를 배제당하는 등의 이런 일들은 절대 없었다.
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텼다고 생각한다. 일이 힘들면 버틴다. 아니 오히려 즐기려고 하는 타입이다. 나를 성장시킬 수만 있다면 힘든 게 대수인가?
하지만 사람이 힘들게 하는 것은 다르다. 내 병원비만 나간다. 그러니 과감하게 이직처를 구하고 퇴사하자.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고 좋은 날이 없을지라도, 난 괜찮다.
이런 경험도 해보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