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덕여 Jan 19. 2023

영화 <3000년의 기다림>, 리뷰

좋은 각색에 대하여.

1.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십중팔구 둘 중에 하나다. 각색을 잘했거나 못했거나. 특히 원작이 방대한 서사를 다루고 있는 경우 '90분의 마법'을 보여줘야하는 영화의 특성상 각색은 영화 성패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는 '영상으로서의 영화'의 예술적 성취와는 별개로 영화의 '기초적인 완성도'와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은 A.S. 바이엇의 소설 <나이팅게일 눈 속의 정령>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낯선 영국 작가의 심지어 단편인 이 소설은 국내에 출간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든 관객은 작가와 원작소설을 모른 채 영화에 던져진다.


 여기서 조금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데, 원작을 모르는데 좋은 각색인지 판단할 수 있는 건가?




2. 

'각색'은 영화 내/외적으로 중요하게 작용한다. 먼저 영화 내적인 이야기를 해보자면, 영화에 등장하는 요정 '진'은 본인이 겪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말한다. 청자인 '비니'는 '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본인이 평생 탐구한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진'을 흥미롭게 여긴다. 그들의 대화 소재는 신화적이고 우화에 가까우며 모든 이야기는 '진'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일뿐 직접 보지 않은 사실에 대해 '비니'는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세헤라자드 앞에 놓인 술탄처럼 그의 이야기에 따라갈 뿐 전지적인 위치에서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이야기'라는 소재로 함축된 신화, 종교, 역사등 실존했다고 여겨지는 인물, 소재를 가져와 질문을 던진다. 이 모든 것이 전해 내려진, 각색된 '작품'이라면? 


 영화는 '비니'의 독백으로 끝난다. 스스로 창조하였던 '비니'의 '그림 속 인물'처럼 '실존한 이야기'라는 믿음만 남은 채 '비니'의 독백으로 관객은 영화에서 설정된 현재의 '시간'에 놓이며, '비니'가 각색한 이야기와 마주한 채 영화는 끝이 난다.



3. 

 조금 더 영화 내에서의 '각색'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영화를 보고 난 관객은 자연스럽게 '진'은 무엇이며 과연 각각의 이야기들이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또는 '병의 의미는 무엇이며', '배경이 북부아프리카 또는 중동인가'등 영화 내적에 위치하고 있는 미장센 또는 메타포들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해석하는 이, 보는 이에 따라 관점이 다르겠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소재는 '이야기'이다. 영화 속 '이야기'는 신화와 신, 역사, 종교와 같이 전승되는 계승된 모든 행위들의 총합이며 객관적인 실재實在라기보단 실체實體에 가깝다. 여기서 대립되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과학이다. 


 실체라 믿었던 '이야기들'은 과학을 만나면서 흔들리게 되었고 이 두 개념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영화 속 묘사된 원초적인 형태의 인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이야기'의 진위를 의심하게 되었고, '이야기'를 진리라 믿었던 그들은 '무언가'를 깨닫게 되었다. 영화는 4번째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변곡점을 보여준다. 결국 인간은 '이야기'로 대상화된 '진'을 사랑하지 않게 된다.


 물론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는 다시 돌아온 '진'과 '에비'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는 여전히 실체하고 있음을 피력하듯 보여준다.



 4.

 그럼 다시 영화 외적으로 돌아가서 원작을 알지 못함에도 이 영화는 훌륭한 각색이었는가? 조금 고민을 하겠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영화는 '이야기'라는 주제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진'과 '에비'의 섹스를 보여주지 않았고(은유적으로 묘사만 되었으나 여부는 알 수 없다.), 비록 묘사가 과장되고 내러티브가 얼기설기 이어진 듯 보임에도 '자극'을 쫓았다고 보기 어려우며, 은유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흩어지지 않고 한 방향을 향해 뻗어갔다. 경우에 따라 '이게 무슨 영화야'라고 생각하는 관객들도 물론 있겠지만 그것은 각색의 영역이라기 보단 취향 문제가 아닐까 싶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리 땅콩에 누텔라를 바르고 소금 설탕 다 뿌려 단짠단짠 하게 만든다손 땅콩 알레지가 있는 사람에겐 먹을 수 없는 음식이며 땅콩이란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각색은 땅콩 위에 발라진 누텔라 정도밖에 될 순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원재료의 맛을 살리면서 풍미를 더 할 수 있는 '소스'의 역할'만' 필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원재재료 본연의 맛을 헤치지 않고 잘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좋은 각색이라 함은 원재료를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원재료에 대한 궁금증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하며, '소스'의 역할을 넘어서 원재료의 맛을 훼손해선 안된다. 최대치가 누텔라까지다. 더 이상 선 넘으면 그것은 각색의 영역이 아니라 원작의 재창조 또는 모티브만 가져왔다고 해야 한다. 극단적으로 크레디트에 based on 이란 문구를 넣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CG를 넣고 좋은 배우를 배치한다손 원작이 다루는 그 중심 주제를 벗어났다면 그것은 각색의 영역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이 훼손된 '사이비'같은 것이다.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의 경우 보고 난 뒤 가장 먼저든 생각은 (아예 정보를 알지 못했기에, 크레디트를 보지 않았음에도) 원작 소설이 분명 있을 것이었고, 두 번째 생각은 원작 소설과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었으며, 세전째 생각은 원작에서 이 주제에 대해 어떻게 표현했는지였다.




 5.

 영화 <3000년의 기다림> 영화 내/외적인 측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영화였다. 현재 우리는 어떤 '이야기'들 속에서 살고 있는지, 그것이 '원작'을 훼손한 이상하게 각색된 이야기가 아닌지 뉴스 속 히잡과 AK총을 보며 생각하게 된다. 비단 그것뿐 이겠는가,,, 불충한 생각이 그득그득해지는 거 보니 여기까지 해야겠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 리뷰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