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O2070, HOMESEEK, ENDZONE
2022년 11월 15일, 세계 인구가 80억 명을 돌파했다. 1974년 40억 명을 기록한 뒤 채 50년이 지나지 않아 두 배로 늘었다. 지구별에 함께 살고 있지만 각자의 삶은 천차만별 다를 것이다. 전 세계인이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일이 뭐가 있을까? 유튜브가 떠올랐다. (문화마다 콘텐츠가 다르기에 같은 경험이라고 하기 뭣하지만 비슷하다고 치자) 통계를 보면 전 세계 유튜브 사용자 수는 30억 명을 넘지 못한다. 이건 땡이다. 그런데 2020년, 전 세계인이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 일이 생겼다. 바로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이다. 지역, 국가마다 강도는 다를 수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을 견디는 일은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코로나 팬데믹의 경험은 모든 사람들에게 저마다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지점은 전 세계 어느 국가도 팬데믹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게 됐다. 협력 보드게임 중 수작으로 꼽히는 '팬데믹'이라는 게임이 있다. '팬데믹' 게임을 재밌게 즐길 수 있었던 이유는 흥미롭고 도전적인 가상의 소재라는 점도 있었다. 현실적인 소재가 되면서 더 재밌게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만 코로나로 좋지 않은 일을 겪은 사람에게는 더이상 하고 싶은 게임이기는 어렵다.
2023년 8월 24일,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류가 시작했다. 더 이상 일본의 일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제가 됐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안전하다고 광고까지 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이미 코로나를 통해 학습했다.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소설, 영화, 게임에서나 접하는 두렵지만 흥미로운 소재였던 방사능이 현실의 걱정이 됐다. 이제는 더이상 흥미로워하며 방사능을 소재로 하는 게임을 하지 못할 것 같다.
방사능 오염은 게임에서 종종 등장하는 소재다. RTS에서는 아군에도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 위해 사용하는 특별한 공격방법이다. 게임에서는 방사능 오염된 지역에 들어가면 지속적인 도트 대미지를 입거나 만피(Full HP)가 줄어드는 등의 효과로 표현했다. ('커멘드 앤 퀀커 레드얼럿 2'에 등장한 방사능 공격 유닛 데졸레이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핵전쟁으로 인해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배경으로 하는 Fallout 시리즈, Wasteland 시리즈 같은 RPG 게임도 여럿 있다. 그동안은 이런 소재의 게임을 하는데 아무 경각심이 없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 체르노빌 등 방사능 오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는 먼 일이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그냥 SF나 판타지 장르 게임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개인적으로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류는 너무나 큰 충격이다. 게임의 소재에서나 쓰이던 '방사능 오염'이 내 현실 문제로 다가온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방사능 공격'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日 방사능 공격 간주" 中 예상보다 강한 반발...배경은?) 과도한 불안과 걱정할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더 걱정된다. 문제 상황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전보다 속도를 내세우는데 불안하지 않은 게 오히려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류, 누구를 위해 서두르는가?)
희망 회로를 굴려 보자. 나는 인터스텔라에 나온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이 말을 믿는다. 실제로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며 온 인류 역사에 대한 신뢰다. 다만 당연하게도 준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미 벌어진 재앙을 수습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재난은 막아야 한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생각했다. 그래서 준비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게임들 중에서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게임들을 뽑아 소개하고, 게임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지점들을 찾고 해석해 보겠다.
2070.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해수면이 상승하여 해안 도시가 파괴되고, 기후 변화 때문에 수많은 지역이 누구도 살 수 없는 곳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미래의 사회를 건설하고, 섬에 정착하고, 다수의 건물, 차량 및 자원을 관리하여 번영하는 거대도시를 만드십시오. 로봇 공장, 정유소, 다이아몬드 광산 같은 생산 체계를 만들어 다양한 생산품과 소비재로 교역하세요.
미래의 설계자가 되십시오
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여 미래 세계를 구현하세요. 타이쿤과 힘을 합쳐 산업과 효율을 추구하거나, 에코와 손을 잡고 지속 가능한 환경친화적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공식 게임소개 중
Ubisoft의 유명 프랜차이즈 게임인 ANNO시리즈 중 5번째 작품이다. 건설&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2070년,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한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기후 변화로 인해 지구와 인류가 엄청나게 고생을 한 것 같다. 건물 디자인이 미래 느낌인 것을 빼면 2070년이라고 하기에는 새로운 자원과 기술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게임 인트로에서 2070년 섬 생활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진지하게 설명하지만, 게임의 분위기는 전혀 무겁지 않다. 게이머는 지도자가 되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해양 도시를 만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ANNO2070만의 흥미로운 게임 시스템은 '환경 균형'이다. 환경의 상태를 나타내는 수치로, 발전만 추구하면 마이너스로 떨어진다. 환경 균형이 낮아지면 주민들의 만족도(세금의 양), 농산물의 생산력이 낮아지고 산성비와 같은 환경 재해가 발생하게 된다. 높아져서 플러스 수치가 되면 앞의 상황과는 반대로 긍정적인 효과가 발생한다. 게임에는 크게 두 세력이 등장한다. 친 산업인 Tycoon과 친 환경인 Eco다. 주로 고 효율 고 오염인 Tycoon 세력을 주로 키우다 보면 환경 균형이 마이너스가 되기 쉽다. 그렇다고 Eco 세력만 이용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다. 저 오염 저 효율이기 때문이다.
2070년의 세상을 어떨까? 과연 인류는, 생활과 산업의 전환을 이뤄내 지구 온난화를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게임 같은 아포칼립스 세계를 만들 것인가?
'환경이 이지경이 됐는데도 Tycoon 세력이 있는 게 말이 돼?' 게임을 처음 시작하면서 했던 생각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처음 생각이 순진했음을 알게 된다. 애초 게임의 설정 자체가 심각한 기후 변화로 인해 일부 섬에서밖에 살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지경이 된 이유는 인류가 기후 변화를 막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그렇다면 Tycoon 세력이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 쉽지 않아 보인다. 세계 각국이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내놓았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45%를 줄여야 하는데 오히려 16% 증가를 예상하고 있다. IPCC(기후 변화에 과한 정부 간 협의체)에서는 10년 안에 지구의 존폐가 달렸다고 경고하고 있다. 2030년이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최근 몇 년 전부터 기후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크게 높아진 것은 맞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이 친환경으로 달라졌는지는 체감하기 어렵다. 세계가 합심하여 함께 대응해도 쉽지 않은데, 정치경제 마찰이 끊이지 않는 현재 상황을 보면 마음을 모으는 것조차 어려워 보인다.
("세계각국 ‘탄소중립’ 외쳤지만…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 2010년보다 16.3% 상승 전망",
[IPCC]① “기후위기 골든타임 10년”…“선택지 없다” 강력 경고)
Homeseek는 다음 세기 초 자원이 부족한 디스토피아적인 지구를 배경으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전략 게임입니다. 인구 과잉, 환경 착취, 심각한 자연 경시는 식수의 고갈을 초래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생존자를 재건할 수 있는 곳으로 이끄는 일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지만 쉽진 않을 것입니다. 물이 새로운 금이 되어버린 말라버린 황무지에서는 매 선택에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 공식 게임소개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의 작은 게임 개발사 TRAPTICS에서 만든 게임이다. 출시된 지 1달이 조금 넘은 신상 생존/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이 게임은 22세기 초, 식수 부족으로 살기 힘들어진 상황이 배경이다. 게이머는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다. 척박한 환경이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겨내며 생존해야 한다. 아직 충분하게 플레이해보지 못했지만, 생존/건설 시뮬레이션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매력적일 것 같다. 게임의 설정과 분위기만으로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게임이라 생각한다.
물 부족은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얘기 아닌가?
이 게임의 설정은 그저 생존 게임을 위해 만든 것일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개연성이 있다. 물 스트레스에 대한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물 스트레스는 물 수요 증가와 담수 공급의 감소 때문에 빚어진 불균형을 말한다. 통계적으로 현재 23억 명 이상이 물 스트레스가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2050년이면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인 약 50억 명이 물 스트레스를 겪을 것으로 예상한다. 인구 증가와 기온 상승은 계속해서 물 수요를 높이고 있다. 가뭄과 적설량의 감소로 인해 물 공급은 감소하고 있다. 게다가 물 오염이 늘고 강수량도 예측할 수 없게 되는 것도 물 스트레스를 높이고 있다. (우리나라도 물 스트레스 국가에 속한다. 물 스트레스 지수와 물 부족은 다른 의미다. 한국서 물 부족 못 느낀 이유…석유 180배 되는 양 수입으로)
우리나라는 일상적으로 물 부족을 경험하지 않기에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환경의 불균형은 하나에 문제에 그치지 않고 연쇄적인 악화를 만들어낸다. 환경 문제에는 국경이 없다. 중국의 황사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면 우리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폭염, 가뭄, 물부족, 사막화, 모래 폭풍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Endzone은 전 세계적 원전사고 이후 소수의 사람들로 새 문명을 개척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도시 건설 게임입니다. 이들에게 새 정착지를 마련하여 지속적인 방사능, 독성 비, 모래 폭풍, 가뭄의 위협을 받는 황폐해진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 공식 게임소개
독일의 Assemble Entertainment에서 개발한 게임이다. 정확한 시점은 없고 세계적 원전사고 이후 100년 후가 배경이다. Endzone이라는 지하 벙커에서 살던 인류가 100년 만에 지상으로 나와 생존하는 스토리다. 게임 아트워크가 포스트 아포칼립스 분위기를 잘 살리고 있다. 'FROSTPUNK'와 'ANNO'를 섞어 놓은 것 같으면서도 이 게임만의 시스템(인구, 직종)도 있어 꽤나 복잡하지만 흥미로운 게임이다.
게임의 인트로 영상이 상당히 강렬하다. 성우의 목소리 톤과 멘트에 압도된다.
"인류는 살아남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 세상을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죠.
무려 100년 넘게 햇빛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서요
그들은 우리의 행복한 삶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우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대지는 황폐해지고 더럽혀졌지만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원전 사고가 절대 발생하지 않으려면?
원전사고는 절대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세계적으로 원전 증가세가 감소했다. 몇몇 국가들이 탈원전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소식은 원전을 유지하거나 추가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2013년을 기준으로 신규 원전을 짓지 않는 것을 가정해도 2060년이 돼야 탈원전을 할 수 있었는데 신규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국가들이 많아지면서 현재로서는 탈원전은 요원해 보인다.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원전은 어쩔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당장 가동 중인 원전을 멈추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IEA(국제에너지기구)의 계획에도 원전이 포함된다. 이 계획의 핵심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크게 늘리는 것이다. 더 장기적으로는 원전 또한 없어져야 할 것이다. 원전이 꼭 필요하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탄소중립, 탈원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다. 인류가 지구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필요하다. 당장 탄소중립 문제가 더 시급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탈원전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게 되어 안타깝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당사자인 일본은 오히려 원전을 늘리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니 말 다했다.
중대 원전사고로 꼽히는(국제 원자력 사고 5등급 이상) 세 사례의 원인은 모두 다르다. 스리마일섬 사고는 단순 노무자의 실수, 체르노빌 사고는 과학자 실수, 후쿠시마 사고는 자연재해다. 실수를 하기에 인간이다. 실수를 이중삼중으로 방지하는 시스템을 만들더라도 사고의 위험성이 0%가 될 수는 없다. 백번 양보하여 실수를 없앤다 치더라도 자연재해를 막을 수는 없다. 사고의 결과는 너무 파괴적이고 돌이킬 수 없다.
"원전 사고가 절대 발생하지 않으려면?"
여기에 대한 답은 한 가지다. 탈원전을 하는 것뿐이다.
게임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지하 벙커에서 100년 동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오염된 지구에서 방독면을 쓰고 평생 살아가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절대 일어날 리 없는 0%의 일이 되기를, 게임이니깐 가능한 흥미로운 설정으로 여기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현실이 될 수도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으로 3개를 소개했다. 핵전쟁 이후를 다루는 'Wasteland 시리즈', 'Fallout 시리즈'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핵전쟁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 뭐. 인류를 믿자.
* 참고자료
<우리에게 보통의 용기가 있다면: 기후 위기, 아직 늦지 않았다>, 탄소 연감 네트워크 저 / 세스 고딘 편 / 황성원 역, 책세상,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