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비디오와 만화책을 대여하는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당시 만화책 한 권을 1박 2일 대여하는 가격은 보통 300원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 근처 대여점은 주변에 경쟁 가게가 없다는 이유로 33%나 인상하여 400원을 받기 시작했다. 지출이 너무 커지게 되어 고민하다가 2km를 걸어가 다른 동네에 있는 권당 200원짜리 가게까지 걸어갔었다. 5권 이상 빌리면 대여 기간을 2박 3일로 늘려줬다. 내일 또 오기 부담스럽고 귀찮았기에 무조건 5권씩 대여했다. 한창 보고 있는 작품이 있다면 5권을 쭉 고르면 됐지만, 현재 보고 있는 작품이 없거나 빌리려고 했던 책을 다른 사람이 대여했을 때는 엄청난 고민이 시작된다. 6~7평 정도 되는 작은 만화대여점에서 볼 수 없었던 성인물, 관심이 없었던 순정물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략 1,500권쯤 있었다. 작품 종류로 치면 100가지쯤 됐으려나. 이미 본 작품이 30가지는 됐으니 70가지 중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여기서 내 기준으로 너무 유치한 내용과 그림체는 또 제외했다. 대략 50가지 중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 너무 오래 결정하지 않고 만화책을 보고 있으면 사장님의 눈치공격이 들어온다. 10분 안에 5권을 골라야 한다. 이 시기가 나에게 있어 문화콘텐츠를 선택하는 첫 번째 경험이었다. 그래서 선택은 성공했냐고 묻는다면, 가끔 성공하고 대개 실패했다. 고르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디지털 콘텐츠 산업의 성장을 특히 밀어주었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정말 손쉽게 온라인을 통해 책, 영화, 드라마, 만화 등을 볼 수 있다. 무료로도 여러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고 유료 구독을 하거나 구매하면 더 많은 콘텐츠 이용이 가능하다. 수천 개의 영화와 드라마, 수만 권의 책, 수만 가지의 웹툰, 틱톡이나 유튜브 콘텐츠까지 포함하면 셀 수 없을 만큼의 선택지가 있다. 뭐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보니 대부분 적당히 고르다가 선택할 것이다. 재밌으면 좋고 만약 재미없더라도 다른 것을 보면 된다. 보는 콘텐츠 대부분은 무료 거나 월정액 형태라서(웹툰은 예외지만 무료가 많고 유료더라도 비용이 높지 않다) 찍먹이 가능하다.
같은 디지털 콘텐츠지만 게임은 다른 콘텐츠들하고는 다르다. 게임은 보는 것을 넘어서는 '경험하는 콘텐츠'다. 관객의 입장에서 콘텐츠를 단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제작사가 디자인해놓은 게임 세계를 주인공이 되어 경험한다. 대표적인 보는 콘텐츠인 영화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극명하다. 영화는 2시간 내외면 감상 가능하지만, 게임의 경험이 어떤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플레이 타임은 게임마다 천차만별이지만, 준비된 콘텐츠를 다 경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보통 수십 시간이다. 심지어는 개인들의 경험 수용능력에 차이가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난이도 차이나 스토리 선택의 차이로 인해, 같은 게임을 같은 시간을 플레이했다고 해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할 수도 없다.
다른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는 콘텐츠와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가격이 콘텐츠를 선택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기에, 비용에 따른 효용성을 따질 수 밖에 없다. 실제로 게임을 접할 때 가장 큰 난관은 비용이다. 한국에서 가능한 월 구독모델로 Microsoft의 'Game Pass'와 Sony의 'PS+ 게임 카탈로그'가 있다. 각각 400여 개 정도의 게임이 가능하다. 앞 문단에서 얘기했듯이, 보는 콘텐츠에 비해 게임은 플레이 타임, 경험할 수 있는 것의 차이 등 선택을 어렵게 하는 변수가 더 많다. 예를 들어, 30시간 이상의 플레이 타임은 너무 지겹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400여개 중에서도 선택지가 많이 줄게 된다. 선호하는 장르나 스타일 등 이런저런 취향을 고려하면 400개 중에 선택지는 많지 않다. 선택이라는 단어보다는 그냥 '주어진 리스트 중에 맘에 드는 것을 한다'라고 생각하는 게 더 맞을 수도 있다. (게다가 신작과 인기 게임은 월 구독모델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에는 구독형태가 아닌 마음에 드는 콘텐츠를 찾아 구매하는 것을 생각해 보자. 디지털 콘텐츠 중에 단가가 가장 비싼 것은 게임이다. 신작들은 6~9만원이다. 주기적으로 열리는 세일 기회를 이용하더라도 게임 하나에 1~4 만원 정도는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체험판을 제공하는 게임은 몇 개 안 된다. 게임을 고를 때 찍먹을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게임은 기본 단가가 높기 때문에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의 기회비용 또한 높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하고 싶은 게임을 찾고 선택하는 일은 보는 콘텐츠를 선택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신중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몇몇 온라인 게임-롤, 배그 등-은 비용을 쓰지 않고 수백, 수천 시간을 즐길 수도 있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플레이 할 정도로 좋아하는 게임을 찾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회가 자주 오지는 않는다. 온라인 게임을 한다고 해서 돈을 아예 안 쓰기도 힘들다. 제작사는 게이머들에게 '스킨'같이 꾸미기 요소를 구매하게 유도한다. 정확한 통계는 찾지 못했지만 온라인 게임을 하는 많은 게이머들은 스킨을 구매하는데 적지 않은 비용을 사용한다고 한다.
1998년 10분만에 5권의 만화책을 골라야 했던 나는, 25년이 지난 2023년에는 게임을 고르고 있다.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고르는데 시간제한 같은 건 없다. 100여 개였던 선택지는 69,000여 개가 됐다. 1,000원을 아끼기 위해 왕복 1시간을 걸어 다녔었는데, 지금은 100,000원을 쓸 수도 있다. 25년 전에 비해 모든 조건이 좋아졌지만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고르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특히 게임이라 더 어렵다. 최종적으로 선정된, 라이브러리에 있는 지난 10년 동안 했던 게임 리스트를 다시 본다. 평균적으로 1년 동안 17개의 게임을 시작했고 그중 3개 정도의 게임을 열심히 했으며 1개는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이것은 내 얘기다. 모든 게이머들이 나 정도로 신중한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얘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작 영화가 등장하면 1,000만 명이 본다. 하지만 아무리 대작 게임이어도 국내 판매량 이 50만 장을 넘기기 어려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스테디셀러 온라인 게임 제외하고 나와 같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다른 문화콘텐츠에 비해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다. 좋은 게임을 고르는 행위가 얼마나 복잡하고 신중한 일인지 공감하는 게이머라면, 나와 같은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나아가서는 게임을 취미라고 말하는 모든 게이머들에게 서로의 대견함을 칭찬하고 응원해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