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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럽맹 Mar 31. 2023

03. 평범한 나의 삶

아빠와 나

모든 게 엉망이었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불수능'이라니...



IMF로 인하여 수학여행도 제대로 못 가는 학년

수행평가가 처음 도입되었던 학년

출석만 하면 공부를 안 해도 수시합격 때문에 고3 교실에서 놀 수 있었던 학년

전년도 수능이 물수능이었다고 제대로 불맛을 본 학년


평소보다 점수가 수십 점이 떨어졌다.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망쳤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고, 공부 잘하는 오빠의 뒤를 잇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은 성격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번 수능은 망했다.


담임선생님과 진로 상담을 하는데

내 성적으로는 듣보잡 대학교밖에 들어갈 데가 없다고 한다.

SKY는 아니더라도 이름 있는 지방대는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는 담임선생님 말을 듣지 않았다.

선생님이 넣지 말라고 하는 국립대를 넣었고, 내 성적으로 장학생이 되어 합격했다.

장학생이라 면접도 보지 않고,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오던 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여기 나온다고 해서 취업이 될까?'


집에 조금이라도 보템이 되고 싶었다.

취업이 잘 되는 학교에 입학을 해야 했다.


그날 저녁 엄마가 입학 신청서를 하나 가지고 오셨다.

'치위생과'

엥? 치위생과가 뭐야?

뭐 하는 직업이지?

"하린아 OO대학의 치위생과 입시 원서야. 엄마 친구가 그러는데 치과 간호사라서 3교대도 없고, 많이 힘들지 않다더라. 혹시 관심 있으면 여기 지원해 볼래?"

"여기는 졸업하면 바로 취업할 수 있어?"

"전문대니 깐 취업은 잘 되겠지."

"알았어. 그럼 여기 갈게."


나는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나에게 4년제, 전문대라는 타이틀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무조건 취업이 잘 되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아빠가 또 안 좋으셨기 때문이다.


1년 전 아빠는 수술 후 3년이 지나니 괜찮다고 일을 하고 싶어 하셨다.

너무 부지런하고 성실하신 분이라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엄마에게는 시집와서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렇게 아프기까지 하니 볼 면목이 없는 듯했다.

본인이 10년 넘게 고생해서 일군 가정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저 지금 당장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아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아빠가 일하시는 것을 반대했다.

이제 수술을 마친 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말을 들어보면 암 수술은 5년은 지나야 완치 판결이 난다고 들었다.

결사반대를 했으나 아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빠는 아는 지인의 전기 공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셨다.


보름쯤 지나서 아빠의 얼굴이 까맣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너무 힘들어 보였고, 숨소리도 좋지 않아 보였다.

한 달이 지나자 사달이 났다.

기침을 심하게 하시던 아빠는 그때부터 피를 토하기 시작하셨다.

엄마 아빠는 또다시 병원을 찾았다.

재발이었다.


그때부터 아빠의 투병생활은 또 시작되었다.

방사선치료, 항암치료...

아빠의 온몸의 털이 빠지기 시작했다.

매일 화장실에서 변기통을 부여잡으며 구토를 하셨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도 넘어오는 쓴 물들...

아빠는 그렇게 많이 아팠다.


몇 개월 만에 겨우 40 정도밖에 안 되었던 아빠의 얼굴이 70대 할아버지가 된 것 같았다.

수 십 차례의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로 인하여 아빠의 기관지는 구멍이 나버렸다.

뻥하고 뚫려버렸다.

그렇게 아빠는 또 수술장으로 향하셨다.

입으로 가래와 피를 뱉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아빠는 상담을 통해 옆구리에 구멍을 내기로 한 것이다.


옆구리에 주먹만 한 속이 훤히 보이는 구멍이 있는데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병원에서 퇴원 후 의료기 상사에서 포타딘, 알코올, 핀셋, 거즈 등 다양한 소독용품과 의료용품을 사들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매일 하루에 2번씩 아빠의 오른쪽 옆구리를 소독해 드렸다.

엄마와 번갈아 했지만 아빠는 내가 해 주는 소독을 더 좋아하셨다.

엄마는 너무 큰 상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손을 떨면서 제대로 못 하시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생이 되어도 직장인이 되어도 집에 늦게 들어가지 않고, 아빠 소독을 해드렸다.

아빠가 잠도 안 주무시고 기다리고 계셨기 때문이다.


집에 늦게 들어간 것은 일 년에 손에 꼽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꿈을 포기하고 선택한 작은 학교에서 나는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인생이 너무나도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저 그런 이유였다.


내 인생이 너무 슬퍼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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