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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z Oct 31. 2022

또다시 걷기로 결심한 이유

2022.10.17

빛도 소리도 없는 심해에서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이게 내 감정을 최대한 그대로 표현한 것이리라.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다. 겨우겨우 생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럼 내 생활이 실제로 그렇게 막막하고 아득한가? 그렇지 않다. 굶지 않고, 따뜻하게 지낼 집과 입을 옷이 있고, 많은 수는 아니지만 사람과의 접점이 되어주는 소수의 지인들과 가족들이 있다. 그럼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우울증을 앓았다는 지인이 이런 말을 했다. “우울할 이유가 없었기에 주변에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이해가 갔다. 가족을 잃어서, 실직을 해서, 사기를 당해서, 건강에 중대한 문제가 생겨서 슬프고 우울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자마자 상대방으로부터 이해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 우울감은 심사를 받는다. ‘우울할 자격’에 대한 심사이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내 우울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지, 누군가 들이댈 것만 같은 잣대로 내가 나를 미리 재어보고, 내 우울이 가상의 잣대로 재어 기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들면 누구에게도 내 감정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위에서 말한 상실, 실직, 건강문제 등 이해받을만한 사유가 있더라도 그것에는 각 사유에 상응하는 이해의 유통기간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상실은 1년, 사기로 인한 상심은 3개월, 실직은 1개월. 그 유통기간이 지나면 그 우울은 자격을 상실한다. 아무도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각자 정해놓은 적당한 우울 기간이 있고, 자신이 세운 기준에는 어느 정도 보편성이 있다고 확신까지 하고들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그것은 표면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그 마음속 잣대를 조정하거나 그와 일일이 부딪히기란 참 어렵다. 우울한 사람이 하기엔 더더욱 벅찬 일이다. 근거 없이 주관에 의해 세운 확신을 대체 무슨 수로 꺾거나 바꾼단 말인가.


내 경우에는 이 우울감을 질병으로 다뤄야 할지 좀 애매했다. 우울할 사유는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무기력할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니까 무기력한 것인지, 무기력해서 무엇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인지 따져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더 어려웠다. 내 감정이나 불안을 드러내는 순간, 그게 그럴만한 일인지 아닌지, 극복은 너의 노력으로 되는 일일 텐데 너는 왜 아무것도 안 하는지 등 내가 듣게 될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의사가 아니지만, 내 경험과 내가 접한 몇 가지 정보들로 결론을 내려보건대, 불안, 무기력, 우울에는 기질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나는 불안도가 높은 사람이고, 그 불안에 휩쓸려 에너지가 고갈되면 그때는 무기력감이나 우울감이 나를 차근차근 방문하고는 했다. 극단적인 생각을 떠올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며 (뒤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극단적인 생각과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고 목적한 바를 성공시키는 것 사이에는 매우 큰 간극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실제로 그렇다) 고통은 두려우나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 자체에는 공포감이 전혀 없으니,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매우 위태롭고 불안정한 사람으로 보이리라. 하지만 나는 이런 나의 성격과 생각에 매우 익숙하고,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부정적 감정들을 거의 매번 그럭저럭 잘 다루고 넘겨왔다. 정해진 루틴이 있는 것은 아니고, 우울이나 불안의 정도와 기간에 따라 내가 선택하는 방법도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내가 쓰는 여러 방법들 중 내가 마지막 순간에 기대는 것이 바로 ‘걷기’이다.


많은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들께서 우울이나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에게 권하는 방법 중 하나가 ‘걷기’라고 들었다. 아마 햇빛을 보는 것이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호르몬을 활성화시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어주기 때문이리라. 또한 몸을 움직임으로써 신진대사를 원활히 해서 건강한 몸을 만들고, 그 몸과 연결된 정신에도 건강한 에너지가 흘러들어 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인 듯하다. 하지만 내가 우울감과 무력감을 느낄 때 걷는 이유는 그것들과 조금 다르다. 내게 걷기는 도망가면서 도망가지 않는 방법 중 하나이다.


걷는다고 내 앞에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 나를 불안과 무력감으로 밀어 넣은 사건이나 상황 자체가 없어지거나 해결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고깃집에서 내 머리카락에 밴 냄새처럼, 장소를 떠나 움직여도 계속 나를 따라다닌다. 깊고 진득하게 스며 들러붙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걷는다고 기분이 딱히 나아지지도 않으며 무엇인가를 할 의욕이 새로이 솟아나지도 않는다. 계속 우울하고 계속 무력하다. 그럼 나는 왜 걷는 것일까.



첫째로 더 깊게 혹은 넓게 생각하도록 해준다.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으면 그 자리에서 하던 생각 외의 것을 떠올리기 어렵다. 하지만 나가서 걷다 보면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조차 그 깊이나 넓이가 넓어진다. 물론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이 말은 듣는 사람은 의아해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안 좋아지는 것 아닌가 하고. 그런데 다른 사람의 경우는 모르겠으나, 내 경우에는 우울이나 불안의 정도를 키우는 것보다 챗바퀴처럼 제자리를 맴도는 생각이 더 좋지 않다고 느껴졌다. 결국 거기가 끝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더 불안하고 더 우울해질지라도 일단 생각의 물꼬가 이어질 수만 있으면, 그 생각을 계속하기 위해 나는 계속 걷고, 그러기에 계속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게 상당히 중요하다. 이미 내가 심리적으로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더는 남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보면 내게 혹은 내 주변에 무슨 일이든 일어나곤 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게 외부 자극으로 인해 나는 동력을 조금 얻는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이런 태도에 대해 수동적이라고 비판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으나, 자주적일 수 있는 정서적 에너지가 남아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우울 및 불안 상태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배터리가 1~2%라도 남았을 때는 충전기를 연결하자마자 배터리 잔량이 늘어나지만, 완전 방전이 되고 나면 와트시가 작은 충전기(그렇다. 나는 와트시가 매우 적은 충전기인 듯하다. 유감스럽게도)로 전력을 공급하더라도 한동안 전원 자체가 들어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때 눈에 띄도록 확실하고 빠르게 전원을 켜고 싶으면 와트시가 큰 고속충전기를 연결하는 것인데, 인생에는 변곡점과 기복이 있으니, 내게 적당한 파도, 즉 큰 와트시의 충전 에너지가 올 때까지 더 방전되지 않도록 유지해주고 있는 것이 내게는 ‘걷기’인 것이다.


둘째로 나 스스로에게 덜 비판적으로 굴고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내 방에 있는 나, 내 집에 있는 나, 내 가족들과 있는 나에서 벗어나, 다양한 나이, 성별 속에서의 나를 볼 수 있게 해 준다. 대한민국에서 40대를 사는 나, 현재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나를 볼 수 있다. 이는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더 뼈아픈 자각이 될 수도 있지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 어딘가에 나 같은 사람들이 나처럼 세상 자기뿐인 줄 알고 여기저기 쏙쏙 들어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어 균형 있는 시각으로 나를 보는 데 도움이 되어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내가 벼랑 끝에 몰린 느낌이 들 때 내가 선택하곤 하는 방법 중 하나가 ‘걷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렇기 때문에 이제 와서 다시 ‘걷기’를 골라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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