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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Oct 09. 2023

옐로페이스 Yellowface - R.F. Kuang

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일제 강점기에 끌려간 한국인 강제노역자의 이야기를 일본인이 쓴다면? 우리는 분노할까?

미국인이 쓴다면 어떨까?  위안부 이야기를 일본인이 쓴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역사에 기반을 두긴 하지만 어쨌거나 창작물인 "소설"의 영역에서 작가의 피부색과 인종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독자는 작가의 피부색을 완전히 무시한 채 아무런 편견 없이 그의 작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소설 #Yellowface #옐로페이스는 그 어려운 질문을 신랄하게 풀어간다.  


주인공은 잘 나가는 중국계 미국인 작가 Athena (영어 발음은 "아띠나"에 가깝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전쟁의 여신 아테네와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 Juniper 주니퍼이다.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는 Athena와 달리, 주니퍼는 그저 평범한 백인 여자다.  예일대에서 만난 동기이고 둘 다 "작가" 타이틀을 달았지만, 둘의 위치는 천지 차이.  첫 작품부터 화제작이었고, 그 후로 내는 책마다 대박을 치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띠나와 달리, 주니퍼는 아직 작가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 이 부분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북미 출판 시장에서, '그저 평범한 백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불만을 가진 주니퍼라니.  사실 영 틀린 말도 아니라서 설득력이 있다.)


아띠나는 글만 잘 쓰는 게 아니다.  스타일도 좋고, 얼굴도 예쁘고 (앤 해서웨이의 동양인 버전이라고 하니 알만하다), 말발 좋고, 글발 좋고.  중국계이지만 영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왠지 있어 보이는 영국 악센트까지.  트위터 팔로워 수가 보여주듯, 아띠나는 스타 작가가 가져야 할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다.  (역시나 세계 어디를 가나 외모지상주의는 피할 수 없나 보다.)


그런 아띠나와 표면적으로는 친구 사이를 유지하고 있지만 질투심에 고통받는 주니퍼. 그녀의 데뷔작은 폭망 했다. 그 덕에 출판사에서도 애물단지 취급이고, 본인의 북에이전트조차 자신의 존재를 잊은 것 같다.  작가로 버는 수입으로는 생활이 안되니 고딩들 과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뭘 해도 잘되는 아띠나가 넷플릭스에 판권까지 팔았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배 아픈 주니퍼의 속을 모르는 아띠나는 축하주를 마시기 위해 주니퍼를 불러낸다.  힙한 식당에서 1차를 끝내고 아띠나의 집으로 돌아와 부어라 마셔라 2차를 즐기던 중, 아띠나가 말도 안 되는 사고로 죽게 되고,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마침 아띠나가 그날 아침 막 끝낸 새 소설의 초고가 떡하니 있다.  하필이면 그날, 때 마침 그곳에.  


아무도 모르는 아띠나의 유작. 정신 차려보니 가방 속에 그 유작이 들어있고, 읽어보니 대작이고, 아직 초고 상태라 출판이 가능한 상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묻히기엔 아까운 작품.  그렇게 주니퍼의 수정을 거친 초고를 자신의 작품인양 출판 에이전트에게 보내는데, 폭망 했던 첫 소설과 달리, 출판사들이 서로 출판하겠다며 달려든다. 이전과는 100% 달라진 대우 - 빵빵한 마케팅 서포트와, 어깨가 절로 올라가는 홍보 스케줄, 늘어난 금전적인 보상 등등.  어안이 벙벙하지만, 주니퍼의 기분은 나쁘지 않다.


"And I wonder if that's the final, obscure part of how publishing works:  if the books that become big do so because at some point everyone decided, for no good reason at all, that this would be the title of the moment." (p. 79)

어쩌면 그게 바로 설명할 수 없는 출판의 마지막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책은,  별 이유없이 그저 모든 사람들이 대박 날 책이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거라고.  


예상대로 책은 잘 팔렸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도 올라가지만, 주니퍼는 몇 가지 구설수에 휩싸이게 된다.


1.  소설의 주제와 작가의 인종에 관한 불편한 시선:  1차 대전 당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돕기 위해 투입된 중국인 노역자들이 겪었던 수많은 차별과 부당한 대우에 관한 이야기를 백인이 쓴다고?  이것이야 말로 문화도용 아닌가?  백인이 이런 이야기를 훔쳐서 쓰는 게 정당한가?


(주니퍼: 그럼 백인은 백인 이야기만 써야 하고 흑인은 흑인 이야기만 써야 하고 중국인은 중국인 이야기만 써야 돼? 작가의 창작 활동을 그런 식으로 가두는 게 맞아? 이것도 예술의 영역인데?)


2. 역사소설에서 사실과 허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백인 작가라 백인들을 너무 선하게 그린거 아냐? 특히 소설 속 백인 선교사의 17살짜리 딸이 크리스마스에 성경과 빵을 나눠주기 위해 노역자들을 방문하는 장면에, 중국인 노역자들미개한 짐승처럼 묘사하고 선교사의 딸은 고귀한 천사같이 그렸잖아.  좀 더 사실에 충실했어야지.  


(주니퍼: 나쁜 사람들만 있었겠어? 좋은 영국인이나 프랑스인도 있었겠지?  굳이 다 악역으로 나와야 해? )  


3.  저 작가 지난번 책은 June Hayward (준 해이워드)로 냈는데 왜 갑자기 Juniper Song으로 이름을 바꿔서 낸 거야? 아시안처럼 보이려는 눈속임 아님?


(주니퍼; Song이 내 미들네임인데, 그게 뭐? 출판사에서 이렇게 바꾸라고 밀었는데?)


결국 아띠나의 작품을 훔쳤다는 말도 나오고, 그러자 주니퍼의 유명세는 독이 된다. 아무리 보지 않으려 노력해도 트위터와 굿리드에 퍼져나가는 악플들은 그녀를 괴롭힌다.  새 글을 써보려 해도 주니퍼는 더 이상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창작하지 못한다. 아띠나의 습작노트를 뒤져 뭐라도 하나 건져야 글을 쓸 수 있다. 엄밀히 창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온전히 그녀의 것이라고 할 수 도 없는 글.  주니퍼는 성공을 맛보지만, 완전한 바닥도 맛보게 된다.

2000도 초반에 읽었던 Arthur Golden의 Memoirs of a Geisha "게이샤의 추억"이라는 소설을 기억한다. 지루하게 늘어지는 묘사를 빼면 꽤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이었는데, 마지막장을 덮고 배신감이 밀려왔다.  이 이야기가 완전한 허구였다니!  마치 실존했던 게이샤의 이야기를 담은 것처럼 시작하는 그 소설은 "여는 말"부터 완전한 픽션이었음. 어차피 소설은 허구인데, 왜 사기를 당한 것 같았을까.


책 중 웃기는 대목 하나를 소개한다. 주니퍼의 에이전트가 이미 독일, 스페인, 폴란드와 러시아에 판권을 팔았지만 프랑스는 아직이라며 덧붙이는 말이다.


"Not France, yet, but we're working on it, ... But Nobody sells well in France.  If the French like you, then you're doing something very wrong." (p. 73)

프랑스는 아직이야.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다 안 팔려. 프랑스에서 반응이 좋으면 그건 네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야.

  

무언가 생각에 빠지게 하는 부분도 있었다.  백인인 주니퍼가 중국노역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낸 것에 대한 어떤 문학비평가의 비판이었다:  


"The Last Front joins novels like The Help and The Good Earth in a long line of what I dub historical exploitation novels:  inauthentic stories that use troubled pasts as an entertaibing set piece for white entertainment." (p. 99)

[주니퍼의 소설은] 캐서린 스토킷의 더 헬프나, 펄벅의 대지와 같은 역사착취소설 중 하나이다. 힘들었던 과거를 백인들의 즐거움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진정성 없는 이야기들.

 

헬프는 옛날에 읽었고 (그닥 문학적인 가치는 없었다), 펄벅의 대지는 얼마전에 읽으려고 사뒀던 참인데 로페이스에서 마침언급하지 않았겠나? 그래서 다음 책은 #대지 ) 

호리호리하게 잘빠진 잔에 담겨 나오는 이태리의 페로니 맥주. 이태리는 멀지만 동네 파스타집은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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