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지라퍼였다.
"참 착하다."
어릴 적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착하다는 말은 마치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 같아 뿌듯했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착하다는 말에 갇혀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말은 점차 내가 만들어낸 굴레가 되었다.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자 했던 나의 행동은 곧 '오지랖'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오지랖'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옷의 앞자락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이 말은 다른 사람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행동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쓰인다. "오지랖이 넓다"는 긍정적으로는 남을 배려하고 돕는 행동을 뜻하지만, "오지랖 부리다"는 부정적으로 참견이나 간섭을 뜻한다. 문제는 내가 이 두 가지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타공인 '오지라퍼'였다. "내가 도와줄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친구들의 고민 상담사이자 문제 해결사였다. 내 도움을 받고 고맙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보며 나 자신이 좋은 친구라고 믿었다. 20대 중반, 믿음에 균열이 생긴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집안일로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술 한 잔 하자. 내가 살게.”
밝은 목소리로 준비한 대사를 읊조리듯 말했다. 그러나 친구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답했다.
“하여튼, 네 오지랖은 알아줘야 해. 그냥 다음에 보자. 미안.”
친구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당황한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민망함과 서운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내 마음도 몰라주고.’ 오지랖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처음에는 억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곱씹어 봤다. 나는 친구를 진심으로 위로하려던 걸까, 아니면 내가 좋은 친구라는 걸 증명하려던 걸까? 스스로를 돌아보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내가 의리 있는 사람이지?"라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던 건 아닌지 깨닫는 계기가 됐다.
한때, 나는 늘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겪으면 "네가 이런 걸 잘하잖아"라는 말과 함께 도움을 요청받았다.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타인의 감정에 휘둘리며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에너지를 쏟았다. 마치 24시간 대기조 같았다. 힘든 일을 겪는 친구의 연락에 즉각 반응하지 않으면 죄책감마저 들었고, "지금은 바빠"라는 말도 꺼내기 어려웠다. 한 번은 밤늦게 친구의 고민을 듣다가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하루 종일 피곤했지만, 친구는 또 다른 부탁을 해왔다. 나는 지쳐갔다.
'왜 나는 내 삶의 모든 시간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고 있을까?'
내 도움은 점차 당연시되었고, 그에 대한 고마움도 점점 사라졌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에 굳이 끼어들었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것이 진정한 도움인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은 내 삶의 방향키를 타인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짜 도움과 나를 소모시키는 행동의 차이를 깨닫지 못했다. 진짜 도움은 상대방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반대로 나를 소모시키는 행동은 상대의 상황과 감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내가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나는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조금씩 태도를 바꿨다. 이제는 친구의 요청이 있기 전에는 먼저 나서지 않는다.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친구는 “너무 방치하는 것 아니냐”며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를 이해하는 친구들은 남았고, 서운한 사람은 떠났다. 선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무겁게 했던 나를 반성하며, 남은 친구들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지랖은 때로는 미덕이고, 때로는 부담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자율성과 감정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 짧은 한 마디에 나의 진심을 온전히 담았다.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
과거 착한 사람 콤플렉스를 떠올리면 이제 웃음이 난다. 나의 도움은 이제 상대방과 나의 마음이 함께 맞닿을 때만 시작된다. 나는 오지랖, 착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완전히 던져버렸다. 이제 착한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