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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Sep 26. 2023

갈증을 달래는 데에는 수박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에피쿠로스의 쾌락

  “쾌락주의” 단어로만 보면 상당히 자극적이고 충만한 욕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절제’에 가깝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은 쾌락과 고통, 두 가지뿐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가 쾌락인 것이다. 


  우리는 먹는 일의 동적인 쾌락과 허기가 가시고 배부른 상태의 정적인 쾌락을 구분할 수 있다. 물론 먹는 과정도 즐거울 수 있지만, 에피쿠로스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우리가 먹는 이유는 허기를 느끼지 않는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다. 우리의 목적은 먹는 행위에 따른 쾌락이 아니라 배고픔에 따른 고통의 극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에피쿠로스주의란 미식에 열광하는 현대적 ‘식도락가 epicure’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목적은 쾌락이지만, 먹는 행위라는 동적인 쾌락이 아니라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정적인 쾌락에 도달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배가 고프지 않다는 만족감이다. 또한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은 단순히 고통스럽지 않은 상태가 아니다. 그렇게 표현하자면 지루하고 밋밋하게 들릴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쾌락이다. <에피쿠로스의 네 가지 처방 p.35~36 / 존 셀라스 / 복복서가>

 탁자 위에 맛있는 여러 종류의 과일이 놓여 있다. 탁자 옆에 있는 나는 목이 마르다. 수박 한 조각을 먹는다. 갈증이 가신다. 그러나 탁자 위에는 여전히 충분한 과일이 남아 있고, 나에게는 과일 전부를 먹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더 이상 갈증을 느끼지는 않지만 달콤한 과일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음에도 갈증이 해소되었기에 나는 더 이상의 과일을 먹지 않는다. 이것이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계산된 쾌락이다. 그렇다고 포도 한 알도 더 먹으면 안 된다고 강제하지는 않는다. 나는 포도 한 알을 더 맛볼 수도 있다. 그 맛을 음미하고 포만감을 느껴도 된다. 다만 내일 다시 갈증이 왔을 때에 물 한잔 대신 풍성한 과일을 가질 것을 기대지 않으면 된다. 여기서, 수박 한 조각을 취할 수 있음에도 굳이 달콤함을 거부하고 물 한 잔을 찾아 나서는 금욕주의와 에피쿠로스의 계산되고 절제된 쾌락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에피쿠로스의 ‘절제’는 ‘금욕’이 아니다.  


 극단적 채식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프루테리언을 에피쿠로스적인 의미에서 해석해 보자. 오로지 식물이 맺는 열매 부위만을 음식으로써 허용하는 프루테리언은 극단적으로 제한된 종류의 식품군만을 섭취하기 때문에 심각한 영향 불균형으로 인한 질병 등으로 육체적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금욕은 고통을 증폭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쾌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 에피쿠로스적 쾌락주의는 퀴레네 학파의 쾌락주의와도 구분된다. ‘퀴레네 학파는 쾌락은 순간적인 것으로 인생의 목적은 즐거운 순간을 가능한 한 많이 축적하는 것이고, 쾌락의 원천은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고 하는데,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이와도 구분된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해소되면 쾌락이 더 이상 양적으로 증가할 수 없다는 것이다.<쾌락/1998년/오유석 옮김>’ 그렇다면 우리는 ‘쾌락주의적 삶’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육체적 고통이 없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이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을 아타락시아(평정심)라고 한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이든 넘쳐나는 과잉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편리를 위해, 혹은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모든 것들은 필요를 넘어서 과잉으로 넘쳐나서는, 이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어쩌면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이 시대의 과잉 문제의 답이 되지 않을까? 에피쿠로스주의 철학의 쾌락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과잉 현상이 계속된다면 지구 환경은 더욱 망가질 것이고 그로 인해 인간은 고통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에피쿠로스 쾌락주의에 반하는 결과이다. 지구인 모두가 에피쿠로스주의자가 되어 계산된 쾌락을 위한 절제된 소비를 하게 된다면 지구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에피쿠로스주의가 자본주의에 끼칠 영향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과잉으로 만든 근원이라 말할 수 있는 자본주의는 또한 이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기반이기도 한 것은 분명하므로 에피쿠로스주의를 받아들임에 있어 자본주의와의 타협이 필요하겠다. 이 자본주의와의 문제는 여기서 논하기에는 그것만으로 너무 방대하니 여기서는 배제하겠다.    


  지구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나의 가장 시급한 식욕 문제를 생각하자. 나는 먹고, 먹고, 배가 불러도 먹고, 먹을 것이 앞에 있으면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 결과 비만이 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물론 어찌해야 하는지 답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음식을 씹으면서 ‘이게 마지막 한 입이야’라고 생각하는데 손은 이미 다음 한 입의 준비를 마쳤다. 에피쿠로스는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쾌락이라고 했다. 쾌락주의는 그러한 계산된 쾌락을 추구하는 철학이다. 내가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적 삶을 살게 된다면 이 식욕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옳다는 것은 알겠는데 아니, 이게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은 되는데 막상 이것을 내 삶에 적용시키려 하는 것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인데 왜 불편하지? 배고픔에서 벗어난 순간 먹기를 멈추었으나 더 먹고 싶은 욕구를 여전히 갖고 있다면, 그래서 그 욕구를 참는 것이 고통스럽다면, 이 고통에서도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닌가? 에피쿠로스의 행복 공식을 적용해서 사실은 나는 원래부터 이만큼만 먹고 싶었다고 정신승리를 해야 하는 것인가?      


  에피쿠로스는 고통의 원인이 욕구에 있고, 이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쾌락의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과하게 충족되면 배탈이 나거나 비만이 되어 건강을 위협하게 되고 그러면 결국 고통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배고픔의 고통에서 벗어난 이후에 먹는 행위는 쾌락이...... 아니네??? 쾌락이 과도하게 충족되면 고통이 된다. 지금까지 내가 쾌락이라고 선택했던 많은 행위들이 사실은 고통을 선택한 것이다. 인간은 진실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그러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내 앞에 고소한 냄새를 폴폴 풍귀는 치킨 한 마리가 놓여 있다. 나는 배고프지 않다. 그러면 이 치킨은 나에게 쾌락이 아니라 고통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치킨을 먹는 행위가 나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이미 오물오물 치킨을 먹고 있다. 손은 어느새 다른 조각을 집어 든다. 바로 여기에 나의 모순이 있었다. 나는 이 치킨을 먹는 것이 나에게 고통인 것을 알면서 먹고 있다고 했다. 알고 있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알고 있지 않은 것이다. 만약 치킨에 푸른색 액체가 발라져 있고, 그것이 독극물이란 것을 안다면, 그래도 나는 그 치킨을 먹었을까? 절대 아니다. 즉시 치킨을 버렸을 것이다. 내가 마조히스트가 아닌 이상 고통인 줄을 아는 그 즉시 그 행위를 멈추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나의 이성 어느 구석에서는 지금 이 시간, 저녁식사를 마친 뒤 야식으로서의 치킨이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을지 몰라도, 나의 또 다른 이성인지 마음인지 어느 구석에서는 이것을 고통이 아니라 맛있는 쾌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먹는 치킨이 나에게 고통인 것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정신승리야 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제 나는 ‘지금 이 음식을 먹는 것’이 나에게 쾌락인지 고통인지 철저하게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적 삶을 살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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