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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해 Mar 11. 2023

어두운 시절 2

그의 시절

 

 

 나의 어머니는 미. 친. 년. 입니다.     

 겨울은 항상 고되었습니다. 눈은 어린 내 종아리만큼 차오르고 그걸 헤치고 길을 내는 버거운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땅이 녹는 계절엔 이 논, 저 논에 손을 빌려주고 늦은 오후면 돌아오셨습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힘들었던 사지를 쉬게 하고 내 입을 채워 줄 수 있었지만, 겨울은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불러주는 곳이 없으니 어머니가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산에서 얻은 고사리를 말려두었다가 장에 팔거나, 터널이나 도로 같은 토목공사라도 있으면 함바집에 찾아가 하루 벌이를 받아오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매년 찾아오는 겨울이었고 흔하디 흔한 날들 중 하루였습니다. 손발이 아리게 바람이 차가운 날이라 장을 찾는 사람이 몇 없었다 했습니다. 눈치 빠른 장사치들은 해가 중천인데도 먼저 자리를 툴툴 털고 들어갔지만, 어머니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고사리 한 뭉치라도 팔아볼 미련에 해를 까막히 잊었다고 했습니다. 어둑해지고 나서야 자리를 털었습니다. 집이라 할 것도 없는 행랑채 같은 방 한 칸. 그곳까지 들고 온 장삿짐 그대로 갖고 돌아가려니 그냥 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등에 업혀 자는 아기가 무슨 죄인가 싶어 멀지만 익숙한 그 길을 험상궂게도 세리는 바람을 때려 맞으며 걸어오셨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노곤함을 아기도 알았는지 유난히 오래 자는 것 같았답니다. 젖 한번 물자고 칭얼대지도 않아 기특하기까지 했답니다. 그날 그렇게 아기는 오래도록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기의 발을 품에 넣고 어머니는 몇 날을 울부짖었습니다.     


 그날 이후, 나와 어머니가 있는 문간방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뻔한 마을 뻔한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좋았습니다. 앞집에 할머니는 해 뜰 무렵이면 찾아오곤 하셨고 옆집의 아주머니는 해지기 전 들리곤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나는 어머니가 울어도 참을 만했습니다. 감자, 누룽지, 어떤 날은 닭 국물에 밥을 적셔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혼자 두고 일을 나서지 않아도 먹을 것이 끊기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정성스러운 사람들의 걱정 한가득에도 어머니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한 눈은 핏줄마저 터져 불그레해졌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산사람이라기보다는 귀신에 가까운 몰골로 어느 날부터 해만 떨어지면 밖으로 뛰쳐나가 몇 시간이고 걷다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법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마지막으로 아기가 기대어 잠들었던 옷만 부여잡고 몇 시간씩 걷다가 소리쳤다가 울다가 다시 걸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머니가 드디어 미쳤다고 했습니다. 미치지 않고 우에 사냐며 혀를 차는 동정과 함께 어느새 어머니는 그 집 미친년으로 불렸습니다.     


"그 집 미친년은 이상 케로 낮에는 처박혀 있고 잠도 안 자는 카 보던데 해만 떨어지면 그 지경이 돼갖고 온 마을 댕겨싸니 저래하다 뭔 일 난다"


미친년이라 해도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살만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슨 일 날까 걱정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더는 참아내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엄마도 갑자기 없어져 버릴까 봐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서 가면 안 된다고 가지 말라고 맥없이 울기도 했습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날들은 지나고 계절은 변하고 해는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참 매정한 일인 것 같았지만 실은 생을 이어가게 만드는 신의 선물 같았습니다.


 문간방에 겨울이 다시 스며들 때 어머니는 정지서 뭐든 끓여 내기 시작했습니다. 온기가 가득한 음식은 맛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드시지 않고 그대로 식혔다가 치우곤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더 이상 그 집 미친년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끝나갈 무렵 아직 쌀쌀한 새벽녘에 나는 어머니 손에 끌려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그곳 그 마을 그 사람들을.   

  

 자고 깨고를 한참 하고 나니 사람 길보다 자동차 길이 더 넓은 곳에 도착했습니다. 아현동. 내가 그 주소를 기억하는 것은 어린 내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첫인상 덕분이었습니다. 대문을 열고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니 잘 정돈된 잔디가 깔린 마당이 펼쳐졌습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보이는 2층 집은 황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곳에 머물고 싶었고 어머니는 그리 만들어주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그 집 식모가 되었습니다.  

  

 2층 집에서의 생활은 그럭저럭 평안했습니다. 어머니는 거칠었지만 몸을 사리는 법이 없어 아현동 사람들은 만족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주인집 아들이 버리는 책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현동의 책들은 내게 수많은 전설과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고 나를 꿈꾸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자 나는 또 어머니 손에 끌려 아현동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싫었습니다. 여기서 살자고 밤마다 투정을 부렸는데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야 이유를 알아차렸습니다. 식모의 아들로 지내기엔 학교는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가 식모였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는 서울 변두리에서 나는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마음에 심어진 꿈이 있었기에 공부는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아현동에서 본 동화책만큼 흥미진진하진 않아도 책은 가장 즐거운 벗이 되었고 어머니의 가판 장사도 제법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더운 여름날 나는 어머니를 뵈러 나섰습니다. 시장에 도통 못 오게 하셨지만 시원한 커피 한잔 드리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가판을 찾기도 전에 시장 초입부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자리 잡은 어머니 가판 옆으로 같은 종의 또 다른 가판 하나가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그 가판을 잡고 마구 흔들며 꺼지라고 악다구니를 쓰고 계셨습니다.


"이거 완전 미친년이네"


 또 다른 가판은 지칠 줄 모르는 어머니의 악다구니에 외마디 분노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미. 친. 년. 나는 잊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도 잊은 줄 알았습니다. 다른 상인들의 눈빛에서 어머니의 악다구니는 흔한 풍경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곳 그 마을에서 저녁마다 소리치며 배회하던 어머니는 이곳 서울에서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보기 전 돌아섰습니다.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안도하였습니다. 아니 안도 그 이상으로 나는 항상 좋았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오로지 나만 지켜내며 살아오신 것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열린 학회에서 발표를 마치자마자 귀국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는 두려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드럽지만 조급한 눈빛으로 나를 맞이한 어머니는 내게 그곳 그 마을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곳이 고통의 시작점이었기에 도망치듯 떠나온 것이 아니냐 물었고 어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이 남편 같았다고 했습니다. 정도 주고 배도 채워주니 그게 남편이지 싶었다 했습니다. 아기를 보내고 받는 온정에 기대고 싶어질까 봐 그곳을 떠나야 했다고 했습니다. 마음에 결단이 서자 꼭 해야 할 일도 있었다 했습니다. 살아있었다면 돌쟁이가 되었을 아기. 젖도 양껏 물리지 못했는데 간질간질했을 잇몸에 죽이라도 마음껏 먹이고 싶었다 했습니다. 아마도 그때였나 봅니다. 어머니가 정지에서 끓여 내던 음식들. 차마 드시지 못하고 식혀내어 들고나가셨던 음식들. 밤마다 어머니는 그것을 놓아주고 오셨나 봅니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의 고단했던 일생이 서글펐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사라질까 두려워 울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참아내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미. 친. 년.이라 불리어도 좋았습니다.

항상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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