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잉홍 Apr 15. 2023

[짧은 소설] 진희의 선물 1

부유방이 쑤셔왔다. 며칠 전부터 유두가 발갛게 달아오르고 욱신거려 왔지만 부유방 통증은 낯설다.    

  

‘나이 때문인가? 늙으니 별 곳이 다 말썽이네’     


서른다섯을 넘기니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에너지가 툭하고 일순간 떨어지는 날이 잦았다. 진희는 서른 중반 이후엔 여성호르몬 수치가 급격히 낮아진다는 여직원들 수다가 생각났다. 이제 그런 나이가 됐구나 싶어 지니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밀려왔다.      


‘이젠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닐까 이리 늦어지다간 임신을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애인도 없는데 아이를 갖지 못할까 걱정부터 하고 있으니 가정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구나 싶었다. 월경이 다가왔다는 증후가 몸 곳곳서 발현됨과 동시에 기분도 자꾸만 꺼져갔다.     

 

꼭 이 사람이면 좋겠어. 진희는 이런 확신이 드는 상대가 아니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 단 한 번의 생에서 어거지로 감정을 맞추고 싶진 않았다. 이미 직장에서 충분히 감정노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미래 혁신 로드맵, 창의 융합 브레인스토밍,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지만 시간을 좀 먹는 회의는 눈치싸움이 대부분이다.


이십 대 후반엔 지겨워진 일에서 도피하기 위해 결혼이란 패를 쥐려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순결하지 않은 목적을 향해 달리다 보면 어느새 덫에 걸리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걸 가까이서 배웠다. 그녀의 동경이었던 이모의 결혼생활을 지켜보며 당장의 문제에서 도망친들 그곳에 행복이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모는 생일날 이모부에게 수억의 땅을 선물로 받았다며 엄마에게 자랑을 늘어놓는 전화를 한적 있었다. 통화를 마친 엄마의 예기치 못한 반응에 그녀의 기억 속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      

“에휴 돈이라도 받아야지. 가엾은 년, 안쓰러운 년”  

   

당시 누가 누굴 가여워하시는 건지 부러움을 연민으로 탈바꿈시키는 엄마의 재주에 감탄스러웠다. 사회 초년생이었기에 돈만큼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건 없어 보였다. 이모부의 재력 바로 옆에 있던 이모는 늘 티 없이 우아해 보였다. 진희가 세상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거칠게 담금질될 때마다 결혼이라는 황금카드가 자신에게도 뽑혔음 하는 바람의 이유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수년의 사회생활이 그녀를 쓸만하게 다듬고 나니 그제야 보였다. 이모에겐 작은 행복조차 없었다.     

 

“나는 선택부터 틀렸어. 돈 걱정만 안 해도 만족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이 사람 내 손을 처음 잡던 날 얼마나 부들거렸는지 아니. 그 떨림에 속은 거지”      


“이모, 감정은 다들 변한다잖아. 결혼해 사랑을 속삭이는 부부가 몇이나 되겠어. 다들 의리로 산다는데”


“그래 사랑이 우정이 된다고들 하지. 그리 변한 것이라면 추억이라도 남지. 이 사람 내가 좋아서 너무 좋아서 떨었던 게 아니야. 신이 났던 거야. 진열된 새 상품을 마주한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유치한 인간이니 애 마냥 새 장난감 손에 넣고 싶어서 안달 났던 거뿐이야. 결혼 후 정성스레 갖고 논게 6개월이야. 진희야 6개월이라고”     

“사랑 바랬어? 이모부 사랑해서 한 결혼 아니잖아”     


“그래 돈. 돈이 8할이었지. 하지만 사랑이든 의리든 함께 넘나드는 감정이 2할은 있었어. 그 2할이 사라지고 나니, 진희야 8할은 뭣도 아니더라.”     


이모의 무기력한 상심에 위로를 건넬 수 없었다. 닮고 싶던 이모의 삶의 껍질을 벗겨보니 드러난 한숨과 한탄에 놀라 막다른 골목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진희는 인생의 점 같은 작은 찰나 일지라도 서로가 전부가 되는 사랑이 있었다면 달랐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모 말대로 남겨진 추억을 때때로 꺼내 조금씩 맛 볼 수 있었다면 이렇게 무기력한 상심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미치니 결혼에 대한 생각의 판이 뒤집혔다.

     

결국 예측 불가의 미래를 향한 결정을 해야 한다면 예식장 문 열고 행진하는 순간만이라도 순수함 그 자체로 서야겠단 결심을 했다. 살다 ‘내 발등을 찍었네’와 같은 아픈 소리를 하게 되더라도 결혼식 장면을 떠올리며 그래도 그땐 순수했고 행복했지라고 회상할 수 있다면 후회에 잠식되진 않을 것 같았다.    

  

이 사람이면 된다는 기준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아직까지 연이 닿지 않는지 한 숨이 절로 나왔다. 노력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더 애를 써야 하는 건지 아니면 이젠 정말 하늘에 제라도 드려야 하는지 싶었다. 조금 더 가면, 시키는대로 성실히 해내면 아주 달콤한 보상이 커다란 나무에 걸려있는 줄 알았다. 학교에선 선생님이 집에선 부모님이 사회에선 회사의 사내 메일이 지속적으로 그러한 메시지를 보내주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서른 중반이 되니  그 맛을 볼 자는 모두가 될 수 없다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매 게임마다 참가자 중 떨어지는 이들이 생기듯 일도 결혼도 자신은 이미 탈락자로 분류된 건가 싶을 만큼 원하는 모습에 다가가지 못해 답답하기만 했다.      


회사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가려는데 친한 선배가 들어왔다.  

    

“진~ 남친 생겼어?”

“무슨 소리예요?”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길래 애인이랑 통화라도 하는 줄 알았지”

“그럼 얼마나 좋겠어요. 아니 애인 말고 이젠 남편이 생겼음 좋겠어요. 거리에 유모차 몰고 다니는 젊은 엄마들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요. 힐 신은 나보다 더 예뻐 보이기도 하고”

“미쳤구나. 미쳤어. 결혼은 제 발로 늪에 들어가는 가장 어리 석인 짓이고 애 생기는 순간 넌 세상에서 지워지는 거야”

“선배 누가 들으면 지독한 경험이라도 해본 줄 알겠어요. 선배는 결혼 생각 없어요?”

“난 비혼주의야 알잖아”

“그것도 부럽네요. 나도 그쪽이면 이리 답답하진 않을 텐데”

“쓸데없는 것에 괴로워 마시고 언제든 이쪽으로 와. 환영이다”   

  

선배와의 대화는 항상 명료하다. 진희는 자신의 결혼관도 분명하다 여기면서도 근래엔 심난한 날이 더 많은데 반해 선배는 흔들림이 없다. 그런 선배의 모습이 위안이 되곤 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몹시 소식 없는 남편이 그립다.      


진희는 퇴근 후 부서사람들과 맥주 한잔하기로 했지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지하철역을 향해 걸어가는데 마음만 스산한 것이 아니라 몸도 서늘해 왔다. 해가 일찍 들어가고 있었다. 가을의 중간인데도 매년 더 짧게 느껴지는 게 지금 자신의 시간 같았다. 더 길어야 할 가을볕이 겨울바람에 밀려 황금빛으로 여물지 못한 채 바닥에 굴러다닐 낟알이 될까 불안했다. 그녀는 아직 오지 않은 계절에 몸서리부터 치는 자신의 모습에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벌써 지치지는 말자. 기분을 끌어올려야겠어. 그런데 왜 이리 쳐지기만 하는지’  

   

진희는 상가의 피로한 간판불빛을 피해 지하철역 안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지상의 불빛만큼이나 맥이 빠진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더 나은 줄을 찾을 의욕이 없어 계단에서 가장 가까운 쪽의 승하차구간에 섰다. 앞서있는 중년의 귀 뒤로 찐득한 역겨운내가 났다. 땀내도 쉰내도 아닌데 윤이 나도록 바른 헤어 에센스 냄새와 오래 묵은 살갗의 냄새가 섞인 꾸덕스러운 이상함이었다. 손으로 코를 막아도 이미 경험한 냄새가 상상되어 구역질이 나왔다. 이대로는 지하철을 탈 수 없었다. 진희는 중년의 오일냄새를 실은 지하철을 보내고 벽 쪽 의자에 다가가 앉았다.    

  

‘오늘 참 힘들다’     


그녀는 잠시 잊었던 부유방의 통증도 느껴졌다. 가방을 멘 어깨가 긴장한 탓인지 눌려진 부유방이 요동치듯 욱신거려 왔고 중년의 기름내가 떠나갔어도 여기저기서 간장이라도 졸이는 듯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평소 둔한 후각이라 하수구 처리장을 지나갈 때도 거부감이 없었는데 이상했다. 감각세포들이 각성이라도 한 듯 제 역할을 민감하게 해내려 난리였다.    

  

집까지 지하철로 걸리는 시간은 딱 15분이다. 지금 직장을 10년 넘게 다닐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큰 부분이 거리였다. 이보다 멀었다면 진희는 버텨내지 못했을 거다. 이 근 거리를 오는데 오늘은 1시간이 걸렸다. 몇 번을 타고 내렸는지 속이 참기 힘들 정도로 메스꺼웠다. 게워내면 차라리 편할 것 같아 역내 화장실을 가보면 나오는 것 없이 헛구역질만 했다. 35세 이후 급격히 떨어지는 여성호르몬의 영향이 이렇게도 다아나믹하단 말인가. 오늘만 지나면 나아지려나 싶은 걸음으로 겨우 집에 돌아온 그녀는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어두운 시절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