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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주의자 앨리스 Apr 02. 2024

아이스크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나는 자유자재로 색과 형태를 변화시킬 줄 아는 돌연변이

    

카멜레온이다. 색과 형태를 바꾼다. 변한 색과 형태는 물리적 환경과 심리적 상태를 대변한다. 잠깐, 형태까지 변한다고? 그러면 카멜레온이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카멜레온이 맞다. 눈에 보이는 게 달라져도 참된 본디의 형체는 그대로이니까. 

변신에 영향을 미치는 물리적 환경은 내가 속한 집단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50대 여성이므로 대한민국 국민, 50대, 여성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그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연발생적인 집단에서는 돌연변이 카멜레온이 보이지 않는다. 좀더 극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난다. 예를 들면 수도공동체 같은. 

2005년 10월 어느 날 나는 수도원에 들어갔다. 며칠 머무는 피정이 아니었고 수녀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기 위함이었다. 등 떠밀리지 않았는데 어마어마한 불안과 긴장, 걱정의 휩싸인 나날을 보내다 확신도 없이 입회하고 말았다. 결정을 번복하고 싶었는데 명분이 없었다. 누구라도 수도원에 가는 이유를 묻거나 가지 말라고 말려주기를 바랐지만 그런 이는 없었다. 입회 전에 가진 성소 모임이나 피정, 심지어 성격 검사까지 입회를 막지 못했다. 성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수도회의 판정이라도 났다면 모든 게 무효가 되었을텐데. 나는 수녀가 되겠다는 말을 입 밖으로 단 한 번 꺼냈을 뿐이었는데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어느새 입회식이 끝나 있었다. 남은 나날이 어떻게 전개될지 조금도 짐작이 가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이 필요했다. 눈 앞에 둔 혼란에 머리는 빠른 회전을 하며 먼저 입회하여 1년의 수련을 마친 청원자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 아이스크림을 만났다. 

입회식 날 저녁식사 후 열린 축하연에는 수련장 수녀님의 선물인 아이스크림 간식이 있었다. “와~” 청원자가 탄식했다. “아이스크림이래.” 들뜬 목소리였다. 그 반응에 평소에 먹기 힘든 비싸고 고급스런 아이스크림인가 했다. 투명 유리 그릇에 색색의 아이스크림이 오목하게 담겨 나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정갈한 자태로 정성스럽게 꾸며졌지만 조악한 싸구려 맛이 났다. 청원자는 이를 모르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을까? 청원자의 감탄을 바라보며 선생 수녀님이 흐믓한 미소를 띠는 분위기에서 나는 그녀의 반응이 정답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것, 아무리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도 크게 기뻐하는 것, 반복되는 식상한 일상에도 기뻐하는 것. 이것이 수련을 잘 받았다는 증거였다. 수련 기간 동안 세상과 단절되어 단순 노동과 기도를 통해 몸과 마음의 정화를 거친 지원자에게 바라는 결과물은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한 기쁨이었다. 

나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카멜레온. 수련 결과가 그렇다면, 답이 정해졌다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답을 제시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얻는 결과값을미리 보여줘도 되겠지. 나는 활짝 웃었고 감탄했고 신기해했다. 의아하고 저항감이 일고 좌절하고 실패할 때도 내 감정은 무시하며 웃었다. 부모님이 면회를 왔다가 거절당하고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울음을 참지 못해 위기를 맞았지만. 그런 나를 쳐다보던 선생 수녀님의 굳은 얼굴이 경로 이탈을 알리는 신호가 되어 바로 돌아왔었다. 


2009년 1월은 몹시 추웠다. 겹쳐 신은 양말에도 발가락은 얼었고 겨울밤은 용산 남일당 건물 앞을 절망에 가까운 어둠을 드리웠다. 불에 탔다는 망루는 거리에서 올려다봐서는 보이지 않았다. 벌써 사건의 흔적을 지웠는지도 몰랐다. 깨진 유리창, 부서진 문,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버려진 폐기물 같은 건 없었다. 거기 모인 몇몇 사람들의 결연한 표정만이 사건의 흔적이었다. 나는 40분도 안되는 시간을 그곳에 머무르며 시국미사에 동참하고 재빠르게 수녀원으로 돌아갔다. 성가를 부르고 기도문을 낭송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공감의 마음을 나누지도 않았다. 미사가 끝나자 재빠르게 사라지는 수녀가 용산의 피해자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나는 2008년 12월 8일 착복을 했다. 겉보기에 수녀 같아졌다. 7,80년대 여고생 교복 같았던 지청원복을 벗고 머리 수건과 수도복을 걸쳤으니 용산에서 만난 사람들에겐 수녀였을 것이다. 수련 과정이 지난했지만 생계에 위협을 받거나 생명을 해치는 사회적 위험은 없었다. 먹고사는 일을 걱정하거나 머리 뉘일 장소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 그저 일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부끄럼 없이 용산에 서 있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수녀로서의 정체성, 수녀로 존재하는 이유일 터였다.

‘뒷뜰을 걸으며 당신을 생각했어요. 그러니 이 산책은 당신의 것이에요.’ 나에게 없는 합일의식. 누군가를 떠올렸다는 것으로 나의 행위, 생각, 느낌이 그의 것이 된다는 논리. 나의 존재가 신의 현존 증거라는 믿음. 이는 수도 삶의 또 다른 정답. 수도복을 갖춰 입고 기도문을 듣기 좋게 낭송하고 낭낭하게 성가를 부르는 정도로 가능하지 않다. 자신을 깨어부수고 새로 태어나는 일에 가깝다. 나는 색과 형태를 변화시킬 줄 알지만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카멜레온. 합리성과 효울성의 문턱을 넘어 신비의 영역에 도달한다면 더 이상 나이면서 내가 아니게 될 것이다. 


2016년 나는 아버지가 발톱을 자르는 모습을 불안스레 쳐다보며 티브이를 통해 촛불집회의 소식을 들었다. 당뇨병을 앓는 아버지가 발에 상처를 낼까 걱정하면서도 촛불집회를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 말에 짜증이 났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 동기 수녀들이 있을 게 분명한 집회였다. 나는 2년 전에 집으로 돌아와 더 이상 수녀가 아니었지만 수도회 가족을 잊지 않았다. 가끔 수도회를 나온 걸 후회하는지 자신에게 묻는데 조금은 돌아가고 싶다고 대답한다. 쪼금이어서 다행이다. 나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카멜레온이니까 더 많이 돌아오고 싶었던 곳에 있는게 맞겠지. 그렇다고 조금의 그리움조차 느끼지 않으려 그 시절을 부정하기는 싫다. 수도원에서 보낸 8년을, 소중한 기억을 내 삶에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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