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억
그날 엄마에게 처음으로 비밀이 생겼다. 아직 엄마에게서 나를 분리시키지 못한 다섯 살이었다. 내부에 피어난 일렁임을 표현할 말이 없었으므로 그날의 일은 비밀이 되었다.
심심했다. 같이 놀던 언니가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혼자 노는데 익숙지 않았던 나는 엄마가 앉은 등받이 의자에 비집고 들어가 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빠가 새로운 놀이를 알려주었다. 세수 대야에 받은 물을 주사기에 담아 물총처럼 쏘는 놀이였다.
주사기는 먹다 버린 간식통이었다. 가게에서 말캉하고 달달한 갈색의 젤리를 주사기에 넣고 팔았다. 주사기 입구에 입을 대고 피스톤을 누르면 젤리가 안으로 쏙 들어왔다. 그렇게 먹고 남은 빈 주사기는 집 안 여기저기에 뒹굴었다. 언니와 나는 빈 주사기를 가지고 놀았다. 입구를 손바닥에 대고 피스톤을 잡아당겨서 피부에 자국이 남는 것을 즐겼고 피스톤이 주사기 통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길이를 먼저 알아채려고 경쟁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언니와 내가 알아낼 수 있는 빈 주사기로 할 수 있는 놀이는.
그날 주사기로 할 수 있는 새로운 놀이가 생겨났다. 입구를 막지 않아도 물이 새지 않았고 피스톤을 빠르게 누르면 힘찬 물줄기가, 느리면 가느다랗고 힘없는 물줄기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대야에 대고 물을 뿌리가가 점점 베란다 바닥에, 베란다를 막아 둔 철창 사이로 물을 뿌렸다. 피스톤을 누르고 나서 고개를 내밀어 결과를 확인했다. 베란다 밖으로 떨어지는 물줄기 모양을 볼 수 없는데도 훨씬 재미있었다. 대야를 철창 가까이 당겨서 밖으로만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고 엄마가 말했다. 밑에 사람이 있을 때는 물을 뿌리지 말라고. 사실 이 금기가 기억의 전부이다. 엄마는 베란다 밖으로 주사기 물총을 쏘대 사람을 맞추지 말라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이 기억이 남았다.
밑에 사람이 서 있다가 내가 쏜 물에 맞았다. 쏘기 전에 확인했을 때 사람이 없었는데 쏘고 나서 내려다보니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고개를 위로 돌려 무엇이 떨어진 것인지 확인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불쾌한 표정, 그 사람은 비난할 상대를 찾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몸을 숨겨 그 사람의 포위망을 벗어났지만 잔상이 되어 눈앞을 떠도는 그 힐난하는 표정에 떨고 있었다. 내가 이상했는지 엄마가 쳐다봤고 나도 엄마를 보았지만 안도감이 들지 않았다.
금기를 어겼다. 사실 대로 말하기가 어렵다. 가슴에 든 두려움에도 엄마에게 달려가 안길 수 없었다. 이를 표현할 말이 다섯 살 나에게 없었기도 했지만 숨기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이게 엄마에게 가진 첫 비밀이었다.
나는 안전한 집 안에 머물러 있었다, 아빠와 엄마도 함께.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가장 안전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조그만 균열이 생겼다. 하찮게 버려졌던 주사기가 멋진 장난감으로 둔갑한 순간, 심심하던 5살 꼬마 아이는 호기심이 충만해서 주사기의 새로운 용도를 탐색하며 지적 세계를 넓히고 있었다. 즐겁게 혹은 천진난만하게 아이는 그 세계가 영원할 줄 알았다.
위험은 닥쳤고 그것은 외부에서 침투했다. 아니 내부에서 시작된 작은 진동과 바깥 세계가 만나 아이의 안전한 세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아니 오롯이 아이가 스스로 허물어버린지도 모르겠다.
다섯 살의 나로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면, 그래서 엄마에게 숨겨진 감정이었다면 울었으면 되었다. 그 나이에 온갖 감정의 확실한 표현은 울음이었을 테니. 하지만 엄마의 궁금해하는 눈을 마주하고도 가만히 있었다, 마음에 들어온 낯선 감정에 놀라서.
그날은 엄마에게서 ‘나’가 분리된 최초의 날이라 기억한다. 자신과 동일시하던 엄마가 타인으로 떨어져 나간 날. 또 내 안에 금기가 새겨진 날이기도 하다. 두려움. 죄책감, 혼돈.
내 인생은 그게 전부였다. 성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현재를 바꾸며 도전하다가 실패에 대한 예감에 불안해하며 안전한 둥지로 도피하는 게. 이를 반복하며 도전과 안전을 오갔다. 차츰 도전보다 안전을 택하는 횟수가 늘어갔고 무력감, 무관심, 자포자기가 기본값이 된 일상을 살았던 듯하다.
*초기 기억: 아들러의 개인심리학 이론, 어린 시절에 경험한 사건에 대한 선별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