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전 Nov 28. 2022

'죽음'을 주제로 수업을 했다(1)

삶이 잿빛일 때, 누구나 한 번쯤 죽음을 생각한다. 교사인 나는 항상 죽음을 수면 위로 끌어내어 수업해보고 싶었다.


물론 몇 년 전에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책과 연관시켜 소극적으로 시도해보긴 했다. 아래는 그 당시 배부했던 수업 활동지 중 일부이다.



‘죽음’이 등장하는 책 소개하기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에 언젠가 죽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죽음과 가까워진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를 서양 사람들이 왜 곱씹었는지 생각해볼까요. 죽음을 생각해봄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향을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것은 단순한 삶의 종말이 아니라 삶이 시작되는 사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만이 죽음을 직시할 수 있고,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가 봄으로써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지요.


죽음이 등장하는, 죽음이 주제가 되는, 죽음을 소재로 하는 ‘책’을 학급 친구들에게 소개해주세요. 책의 전체 줄거리를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발표 분량은 5분 내외로, 책 속의 '죽음'이 의미하는 핵심 부분만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죽음을 생각해봄으로써 우리의 '삶'의 방향을 더 깊이 고민해봅시다.


[발표 내용의 예시]

예시일 뿐입니다! 아래의 예시 주제를 모두 말하지 않아도 되며 선택할 수 있습니다. 또는 본인이 새로운 소주제를 생성해도 됩니다. 단, 책 속의 '죽음'이 의미하는 핵심 부분만 발표할 수 있도록 하세요!

예시 : 책에 등장하는 '죽음'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저자는 그 죽음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그 죽음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그 죽음을 통해 새롭게 배운 점, 그 죽음에 대한 나의 느낌과 생각, 그 죽음이 우리에게 어떠한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는지, 만약 주인공이 '나'라면 어떠한 삶을 살지(어떠한 죽음을 맞이할지) 등


[특전]

  책 한 권을 열심히 읽고 발표를 통해 의미 있는 생각을 던져준 학생에게 생기부 교과세특에 기재합니다. 발표자가 독후 기록지까지 내면 금상첨화! 생기부 교과세특 및 독서활동사항에 모두 입력됩니다. 발표 수업이 끝난 후 친구들이 소개한 책을 읽고 1학기 안으로 독후 기록지를 제출하면 과목 독서활동사항에 기록합니다


['죽음'과 관련 있는 책의 예시(이것도 예시일 뿐!)]

※문학 작품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안나 카레니나>>

-카프카, <<변신>>

-카뮈, <<이방인>>

-조지 마틴, <<얼음과 불의 노래(왕좌의 게임)>>

-호메로스, <<일리아드>>, <<오디세이>>

-시 : 톨스토이, <살면서 죽음을 기억하라>,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셰익스피어 4대 비극<<리어왕>><<멕베스>><<햄릿>><<오셀로>> 및 <<로미오와 줄리엣>>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본 전문가의 책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 <<상실 수업>>, <<인생수업>> 등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서울대 의대 정현채 교수,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가>>

-셸리 케이건, <<죽음이란 무엇인가>>

-한국 죽음학회, <<죽음 맞이>>

-캐스린 매닉스(영국 완화의학 의사), <<내일 아침에는 눈을 뜰 수 없겠지만>> - 40년 간 말기암 환자

    

※죽음에 관한 에세이

-머라이어 하우스덴, <<한나의 선물>>

-키토 아야, <<1리터의 눈물>>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사노 요코, <<죽는 게 뭐라고>>

-권혁란,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헬렌 니어링,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그림책

-황선미, <<마당을 나온 암탉>>

-사노 요코, <<백만 번 산 고양이>>

-알퐁스 도데, <<스갱 아저씨의 염소>>


[유의사항]

-발표자료는 PPT나 종이 원고(2장 내외)를 기한 안에 제출하세요.

■과제 제목 및 파일 제목 : '제목'에 반드시 학번, 이름, 저자 및 책 제목을 밝히세요.

(예시: 21010_홍길동_카뮈의 이방인)

-PPT를 준비한다면 슬라이드 한 장에 너무 많은 글을 싣지 않도록 하세요.

-발표 시 준비한 발표 자료나 원고를 그대로 읽지 않도록 하세요.

-발표 후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질문이 나올지 예상하면서 발표를 준비해보세요.     




책 목록에는 내가 방황하는 삶 속에서 읽었던 책들이 꽤 포함되어 있다. 발표 희망자들이 발표한 책을 보면 이 목록에만 국한되지는 않았으며 몇몇 학생은 직접 실물 책을 들고 왔다. 여기서 '희망자'란 대부분 자발적이기보다는 [특전]에 의해 (타율적으로) 움직이는 학생들이다. 10년 간 무수히 많은 고등학생을 대한 후, 안타깝고 슬프고 또 부끄럽지만 나름 타협한 부분이다.



재외 한국학교에 있는 올해는... 이전과는 다르게, 죽음 수업을 '한 권의 책'을 다함께 읽으면서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여기서 '제대로'란 고전이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깊이, 심연으로 본인의 죽음(또는 삶)으로 들어가 보자는 의미이다. 하지만... 올해 재외 한국학교 학생들을 처음 만나는 입장에서 학생 수준도 파악되지 않았고 이와 같은 수업을 해 본 적이 없으므로 무턱대고 시도하기는 조심스러웠다. 한발 물러나, 먼저 책 대신 영화 '소울'로 시도해보기로 했다.(물론 소울은 애니메이션으로써 가볍게 접근할 수 있지만 다루는 주제는 꽤나 진중하다.)


한 차시 수업은 아래 세 가지 활동이 반복되었다.


1. [개인] 약 25분 간 영화를 함께 보면서, 영화 내용의 줄거리, 기억나는 장면 등을 학습지에 자유롭게 작성한다. 꼭 글이 아니어도 좋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들었던 의문, 질문 등을 쓴다. 이를 '개인 질문'으로 명한다.


2. [모둠] 모둠원과 함께 메모한 내용이나 개인 질문을 공유한다. 이 중에서 모둠원이 의논하여 가장 좋은 질문을 하나 뽑는다. 이를 '모둠 질문'으로 명한 후 학습지에 기록한다. 그리고 칠판에 모둠 질문을 쓴다.


3. [전체] 칠판에는 모둠의 수만큼 모둠 질문이 적혀 있다. 이 중 가장 좋은 질문을 하나 뽑는다. 이를 '대표질문'으로 명한다. 대표질문에 대해 3줄 정도로 자신의 답변을 짤막하게 작성한다.


당시 사용한 학습지는 아래과 같다. 원래는 한 차시 안에 1~3 세 가지 활동을 끝내는 것이 목표였으나, 시간 관계상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화를 다 볼 때쯤 되면 학습지가 여러 장 쌓인다. 이후 학생들에게 그 학습지들을 들춰 보면서 지금까지 논의했던 각종 질문들을 정리해보고, 그중에서 본인이 A4용지 1장 분량의 긴 글을 쓸 수 있는 주제나 글감을 선정해보라고 했다.


영화를 보며, 학생들이 스스로 대답해보고 싶어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스파크란?

내 꿈(삶의 목표)은 무엇일까?

내가 (주인공처럼) 무아지경에 빠진다면 무슨 일로 인해서일까?

죽음 직전 내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면 무슨 장면이 나올까?

고대하던 꿈을 이루기 직전 삶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부모가 자녀의 삶에 어느 정도까지 간섭해야 할까?


노파심에 나 또한 아래 글을 직접 써서 준비해 갔다. 아이들은 예시를 보여주면 단박에 이해한다. 다시 읽어보니 포장된 구석이 없지 않다. 아직까진 학생들에게 나의 모든 번뇌를 털어놓을 용기가 없으니...



목표와 일상의 균형 있는 삶이란?

-영화 ‘소울(Soul)’을 통해 살펴본 나의 삶과 죽음


영화 ‘소울’은 “평생 꿈꿔왔던 일을 이루기 바로 직전, 내가 죽어버린다면?”이라는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너무 아쉬울 테다. 그것만을 위해 하고 싶은 것들을 참고 인내해가며 전진했는데. 주인공 ‘존 가드너’도 마찬가지이다. 죽기 일보 직전이지만 그의 영혼은 이를 극도로 거부한다. 존은 지구로 가고 싶지 않은 ‘22번 영혼’과 은밀히 거래한다. 아직 미완성인 22번의 지구 통행증을 만들 수 있도록 존이 도와주고 그것을 얻게 된다면(지구 통행증이란 태어나기 이전 세계의 존재들이 그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지구로 가기 위해 발급되는 배지 같은 것이다), 존은 다시 지구에서의 삶을 살고 22번 영혼은 영원히 지구로 가지 않을 수 있으니, 둘 다 상호 이익(win-win)이 아닌가.


우여곡절 끝에 존은 지구 통행증을 얻는다. 존에게 ‘평생 꿈꿔왔던 일’이었던 재즈 공연을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루어낸다. 그런데 공연 후 존의 표정은 의미심장하다. ‘이게 끝이었어?’라는 실망스러움이 언뜻 지나가는 것 같다.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이 축하받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목격하고, 때로 부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망해오던 꿈을 이룬 이후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해서는 조명되지 않는다. 영화의 진짜 주제는 여기에 있다.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돌진하는 삶만이 전부라고 믿는 자들이 놓치는 무언가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 존과 22번 영혼은 모두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조는 나의 과거를, 22번 영혼은 나의 현재 및 미래의 지향점을 떠올리게 만든다. 조는 재즈 연주자라는 소중한 꿈을 향해 평생을 바쳐왔다. 공연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야 하므로 주인공 조는 영화 내내 초조하고 급하다. 지구에서의 삶이 처음인 22번의 영혼처럼 주변을 돌아보고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나 또한 그랬다. 오직 명문대를 위해 달렸던 고등학교 생활, 수십 장 되는 과제에 매번 허덕이며 최고의 학생들과 경쟁해야 했던 대학 생활, 졸업 후 백수가 되어 교사를 목표로 임용시험에 매진하던 재수생 시절, 그리고 기한 안에 석사 논문을 완성해내기 위해 밤을 새우던 대학원생일 적... 모두 다 내가 설정한 목표였고 내가 꿈꾸던 목표였으며 결국 이 목표를 운 좋게 달성해냈다. 그런데 조가 공연 후 집에 돌아올 때 느꼈던 허탈한 감정처럼, 이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22번은 그토록 지구에서의 삶을 거부했으나, 막상 육신을 갖고 지구에 온 후로는 우리가 흔히 지나치고 지루해하는 일상 하나하나에 눈이 반짝인다. 따스한 햇볕 사이로 뱅글뱅글 떨어지는 꽃잎, 맛있는 베이컨이 박힌 피자 한 조각, 서늘한 지하철 통풍구 바람, 저녁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들의 모습에서 말이다. 영화는 꿈을 이루는 것만큼, 때로는 지루할 수 있는 일상의 소중함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삶의 목표를 갖는 것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다. 목적 지향적인 삶이 나쁘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좋아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되, 현재 함께 있는 사람들 및 주변의 작은 변화들을 놓치지 않는 마음의 여유를 잊지 말라는 뜻일 테다.


나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 소중한 일상이란 무엇일까? 지금 OO한국학교에서 새롭게 만난 학생들 및 동료 교사들과 나누는 따뜻한 눈길과 관심, 그리고 한국에 있는 내 가족 및 친구들과의 안부와 연락, 그리고 바쁜 내 일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소소한 취미생활 등일 거다. 교사 생활에 10년 ‘짬’이 생겼으니, 학교를 얼른 졸업하고 싶어 하는 대다수의 십 대 학생만큼 학교 일상이 지루할 때도 솔직히 있었음을 고백한다. 어느덧 내 꿈은 매년 반복되는 교과 수업,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를 상대하고 실랑이하는 매일의 똑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교사가 되기를 어릴 때부터 20년 동안 열렬히 꿈꿨고, 심지어 학교 교사되기에는 성적이 아깝다는 어른들의 비아냥에 반항하면서까지 꿈을 이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내 삶에 돋보기를 가까이 대보면, 이 반복되는 일상에도 22번 영혼이 느낀 것과 같은 기쁨과 감사함이 분명 있다. 영화 소울은 주인공의 죽음[死]으로 시작되지만,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생(生)을 어떻게 하면 균형 있고도 충실하게 살 것인가를 일깨우고 있다.





학생들은 주어진 수업 시간(약 4시간)에 각자의 이야기를 썼다. 아이들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들을 찬찬히 살폈고, 질문하는 학생이 있으면 그들 옆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었다. 어떤 학생은 자신의 글에 걸맞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무려 한 시간을 고민했다. 나는 아이들의 죽음과 삶이 담긴 글을 '작품'이라 칭했다. 이 작품들을 큰 사이즈로 출력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줬고 또 읽혔다. 본인 옆에 앉아 있는 친구의 진솔한 이야기가 담긴 글이어서 그런지 아이들은 열심히 읽었고 경청했다. 나 또한 처음 만난 학생들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책'으로도 진행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번에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다!

- '죽음'을 주제로 수업을 했다(2)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학생들이 작가가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