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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호 May 27. 2024

그날은 그렇게 왔다

독후감

 읽은 책이 좋아서 브런치에 공유해 봅니다.

#방탈



#그날은그렇게왔다
 
 
사건의 발단,
“11시에 갈까? 12시에 갈까?”
 
“12시 30분까지 와.”
 
“엇, 감사함미당~”
 
카톡으로 교대시간을 묻고 12시 20분에 가게에 도착한 내게 대뜸 화를 낸다.
 
“12시 30분까지 오란다고 정말 그 시각에 오냐? 너처럼 게으른 여자는 처음이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나에게 불행한 마음을 견인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일주일 넘게 불운으로 가는 열쇠를 쥐어주었고, ‘짜증 나’ ‘불행해’ ‘우울하다’ ‘힘들다’ 불평불만으로 일상을 물들였다.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공산당도 아니고, 무슨 독재정치가 이리 심해?’
결국 매일매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되어 가던 차에
#그날은그렇게왔다_고경애 작가님의 글을 만나게 된다.



 



 
개개인의 상처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 마땅하나 한 권의 책을 통해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중증장애(생후 6개월 후천적) 아이를 십 년 넘게 홀로 돌보다 결국 가슴에 묻은 엄마의 이야기였다. 나의 절대적인 아픔을 초월하는 그녀의 아픔은 그간 속상해하던 속 좁은 중년의 사연을 쪼그라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게 뭐라고?
최소한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그렇니까 체력, 정신까지 모조리 나를 위해 소비하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화나고 내가 속상하고 내가 슬프고 그래서 울고, 짜증 내며 술을 마시고 여행하고 말이다.





 
반성한다. 나의 절대적인 상처를 좁쌀만 하게 만든 그녀의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상처를 진심을 다해 위로한다.
침대에 누워 책을 읽으며 눈물을 닦아야 했지만, 차마 화장지를 찾아 눈물을 닦는 것조차 그러니까 그런 에너지를 또 나를 위해 쓰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 그냥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필사문장
 
준영이도 이젠 필요에 따라 산소 호흡기로 호흡을 유지했다. 벌써 열 살인데 몸은 한 네다섯 살 아이만큼밖에 크지를 못했다. 아이가 잘 안 큰다고 하니 담당 교수님이 “커서 뭐 하게, 더 힘들기만 하지.”라고 해서 또 많이 울었었는데, 아이를 안고 움직이기가 힘들기 시작하니 그 말도 납득이 되었다.
P.111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 네 인생을 살아라,
준영이도 네가 슬퍼하는 걸 원치 않아,
잘 간 거야,
애도 너도 너무 힘들었어,
아이를 위해서라도 잘된 거야,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슬프면서도 이상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더 나은 생명이 과연 존재하는가?
나에게 울지 말라고 안 했으면 싶었다.
P.136



 
 
작가님! 나는 행복해도 되는가? 물으셨죠. 암요 암요 행복하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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