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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범 Dec 01. 2022

서장-피페라투스 1

1

"니나 바이나즈! 이 망나니 녀석아!"

"지붕 물어내!"


귓가를 스치는 검은 머리를 반의반쯤 올려 묶은 소녀가 어두운 색의 망토와 넓은 바짓단을 휘날리며 마탑 창고의 지붕을 달리고 있었다. 소녀는 깔깔 웃고 있었고, 지붕 위의 고양이와 땅 위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지붕 끝에 가까워지자 소녀는 손으로 총을 만들어 사람들을 겨루었다.

"빵!"

소녀의 손끝에서 달 양귀비 꽃잎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얀 꽃잎은 길을 채우고 시야를 채우고 몇몇 사람들의 입까지 채워버렸다.

"니나 바이나즈!"

소녀는 깔깔 웃으며 마법으로 발아래 공기쿠션을 만든 뒤 회랑을 뛰어넘어 도서관 방향으로 달아났다. 그 뒤에서, 지붕 끝에 다다른 황갈색 줄무늬 고양이가 분노에 차 포효했다.

도서관 6층 연구실, 현자 라이메는 징글징글한 어린 제자에게 오렌지 시럽을 곁들인 계피 우유를 내밀며 훈계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시커멓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 우람한 검은 고양이가 금처럼 빛나는 눈을 크게 뜨고 꼬리를 탁탁 흔들고 있었다. 소녀가 비실비실 웃으며 계피 우유를 홀짝였다.


"고양이를 꼬시는 중이었어요, 스승님. 오래간만에 발견한 딸린 마법사가 없어 보이는 고양이었다고요."

"그건 네 생각이지 고양이 생각은 다른가 보구나. 내가 언제 고양이를 귀찮게 하라고 가르쳤지? 네 고향 마법사들도 그럴 사람들이 아니지 않느냐?"

"살이 쪘으니까 나랑 놀면서 운동 좀 하자,라고 했을 뿐이에요. 마탑에 살기 시작한 데다 진짜 예쁜 얼굴에 바닥에 배가 살짝 스치고 있었는데 주변에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고요. 수컷이니까 임신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럼 마법사는 없고 마력은 있는 고양이지요."

"마력은 있었어?"


검은 고양이가 물었다.


"네, 그러했습니다, 플루테 님."

"니나, 네가 원하는 관계는 고양이가 먼저 허락해야 맺을 수 있는 관계야. 그 고양이, 아르나는 마법사도 집사도 필요 없다고 천명하고 마탑에서 깨끗한 물이랑 고양이 박하만 받아먹으면서 쥐를 잡아주기로 했다고. 주방 요리사나 창고 담당자랑 똑같은 마탑 직원이란 말이야. 그리고 너 때문에 화가 나서 파업 중이야."


현자는 자기 고양이에게 고마워하는 눈빛을 보내며 제자에게 말했다.


"가서 사과하렴, 니나. 창고도 튼튼하게 고쳐두고.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는데 뭐 그렇게 마음이 급해서 고양이를 찾는 거냐."

"하지만 스승님. 고양이를 만난 마법사들은 훨씬 연구가 잘 된다고 하는데요. 마법도 몇 배는 강해지고요."

"넌 아직 열다섯 밖에 안 되었잖느냐. 네 마법이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너와 잘 맞는 고양이를 만나게 될 거다. 고양이는 마법사가 충분한 힘을 갖췄을 때 사랑이나 우연처럼 찾아온단다. 안 그래도 네 힘은 마탑에서 손꼽히게 강해. 너와 맞는 고양이를 쉽게 찾겠느냐."


니나는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우유 잔만 쳐다보았다. 우유가 식어 오렌지 향이 줄고 있었다. 라이메 현자가 연락 마법용 향수 제조법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마저 마시고 가서 사과하렴. 약초밭에서 고양이 박하도 따고. 너도 슬슬 연락용 향수를 만들어야지. 네가 내게 할 말이 있을 때 편할 게다."

"예."


니나는 사람들이 씩씩대며 쌓아둔 달 양귀비 꽃잎을 훅 불어 사라지게 만든 뒤 창고 지붕을 고쳤다. 니나의 장기인 환영 마법은 공기와 상상력과 화려한 연출을 합쳐 만드는 것으로 장난을 칠 때 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좀 더 까다로운 숙제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숨은 고양이를 찾는 것이었다. 한참을 헤매다 귀리 밭 돌담에서 찾은 아르나는 니나는 외면했다. 애걸복걸 열댓 번의 사과가 끝난 뒤 아르나는 또 귀찮게 굴면 죽여버린다는 협박과 함께 니나의 머리를 쥐어뜯고 사라졌다. 고양이 발톱에 긁힌 두피에 술을 섞은 약을 문지른 니나는 싱싱한 바질과 고양이 박하를 한 바구니 따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니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벽에서 마법용 약을 담아둔 서랍장이 튀어나왔다. 두 번째로 손가락을 튕기자 책상이 길어지고 약품 제조용 장비들이 설치되었다. 니나는 압축시킨 고양이 박하 줄기들을 공기 중에 가득 채운 뒤 손을 휘저으며 꽃잎들에서 향유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팔을 휘저으며 춤을 추자 고양이 박하는 단단한 공처럼 뭉쳐진 섬유질과 은근하고 달콤한 향유 한 냄비로 나뉘어 있었다.
니나는 다시 손가락을 튕겨 벽장에서는 지난해 말린 라벤더를 꺼내고 마법용 약서랍에서 고향에서 가져온 달 양귀비 향유, 오렌지 꽃 기름과 하얀 생후추, 바질 기름, 말린 감귤류 껍질 한 움큼을 꺼내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니나는 한 국자를 덜어낸 달 양귀비 향유에 일단 절구에 거칠게 으깬 생후추를 잘 털어 넣은 뒤 공중에 띄운 라벤더를 썰어 넣고 은근하게 끓였다. 고양이 박하 향유 냄비에는 신선한 바질과 바질 기름 세 방울, 감귤류 껍질을 넣은 뒤 단단히 뚜껑을 닫았다. 한 시간 정도 중탕으로 달인 뒤 니나는 오렌지꽃 향유를 열 방울 정도 떨어뜨리고 김이 식기 전에 뚜껑을 봉했다.

향수용 알코올에 말린 생강과 비틀어 으깬 신선한 로즈메리 한 단까지 던져 넣은 니나는 드디어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와인처럼 깊은 적갈색 망토와 빨간 리본 넥타이를 풀어 옷장에 넣고 까만 가죽으로 만든 허리띠를 푼 뒤 상아처럼 옅은 노란빛 웃옷과 흑갈색 바지를 적당히 개어 정리한 니나는 견과류와 말린 햄을 들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서서히 해가 지고 별과 달이 밝아졌다. 니나는 방 안에 별빛과 달빛을 불러와 밝힌 뒤 말린 햄에 싼 호두와 피스타치오를 씹으며 고대어 사전을 읽기 시작했다.

라이메 현자가 처음부터 니나를 거칠게 가르쳤던 건 아니었다. 니나가 마탑에 도착했던 건 일곱 살 때였는데, 짙은 회색 눈을 동그랗게 뜬 시골 소녀는 천진하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니나는 석 달 만에 기초 마법을 외워서 응용하기 시작했고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을 보며 서로 반대 형질을 지닌 마법을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섞어 쓰기 시작했다. 라이메 현자는 니나가 들고 온 마을 마법사와 떠돌이 마법사의 편지를 다시 찾아 읽어야 했다. 마탑 교수회의에서 니나는 당당한 뜨거운 감자로 등극했다. 이 꼬마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격한 토론, 한숨, 그리고 씁쓸한 결론이 내려졌다. 니나는 모든 교수들의 시험을 통과한 뒤 입학 반년 만에 중급 마법을 배우게 되었다.
2년 뒤 니나가 자기보다 못해도 일곱에서 아홉 살은 많은 학생을 제치고 수석으로 중급 과정을 마치자, 라이메 현자는 니나를 직접 가르치기로 했다. 그 뒤로 니나는 오전에는 심화반 수업을 천천히 들었고, 오후에는 라이메 현자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 심화반 수업은 1년 만에 쉽게 따라갔지만, 스승의 과제는 언제나 어려웠다. 라이메 현자는 일부러 역사에 나올 법한 마법만 공부시키며 니나가 모든 수준의 마법을 자유롭게 쓸 때까지 몰아붙였다. 남들이 심화반 논문을 하나만 쓰고 졸업하거나 연구 과정 수련사가 될 때, 니나는 논문이 끝나면 다음 주제로 넘어가 새 논문을 써야 했다. 그러기를 5년, 니나는 식초에 절인 앤초비처럼 마법에 푹 절여있었다. 라이메 현자는 슬슬 니나를 마탑 밖으로 내보낼까 고민 중이었다. 마침 일이 터졌고 이 어린 제자는 고양이 일이라면 눈을 뒤집고 달려드니 아마 시키지 않아도 덤빌 터였다.

문제는 니나를 내보낼 만한 사건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라이메 현자는 한숨을 쉬며 방어 마법을 다룬 오래된 책들을 두 권 꺼낸 뒤 자기 스승, 대마법사에게 물려받은 작은 허리띠 장식을 꺼냈다.

그 허리띠 장식은 은으로 만든 것으로 옛 문양이 복잡하게 세공되어있었고, 일곱 개의 오닉스를 박아 북두칠성을 표현한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대마법사는 그것이 어느 바다 마법사가 자기 자식을 위해 만든 것으로 백 명의 마법사가 귀향 마법과 방어 마법을 걸어준 물건이라고 했다. 그 뒤로 허리띠 장식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혹은 딸로,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모에게서 조카로 하는 식으로 다음 세대에게 주는 호신부가 되어있었다. 라이메 현자는 땅거미 지는 하늘 아래로 나가 흐릿한 초승달을 확인한 뒤 어린아이를 위한 수호 주문을 허리띠 장식에 불어넣었다. 다음날 오후, 마늘 수프 냄새를 풍기며 니나가 연구실로 들어오자 현자는 제자가 귀여워 웃고 말았다.


"니나, 이리 와 보렴."


라이메 현자는 책상 위에 지도 몇 장을 내놓았다.


"수도 근교에서 고양이가 사라지고 있다는구나. 얼룩 고양이나 색이 짙은 고양이만 골라서 말이다. 새끼나 어른 고양이나 다 잃어버리고 있단다. 어제 오후까지 잃어버렸다는 고양이들의 위치 지도다. 네가 그 고양이들을 좀 찾아오렴."

"왜 없어지는지 무슨 단서가 있을까요, 스승님?"

"제일 오래 사라진 고양이가 닷새 전부터 보이지 않았고 다시 찾거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단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누가 잡아두고 있겠지. 찾기 마법을 잘 써 보렴."

"예, 스승님."


니나는 얌전히 지도를 살폈다. 수도 이곳저곳을 포함해 교외 남동쪽에서 많은 고양이가 사라진 상태이었다. 북부나 서부는 좀 띄엄띄엄했다. 시장 고양이들은 거의 씨가 말라 있었다.


"스승님, 만약에요. 고양이들을 누가 가둬두고 괴롭히고 있다면 제가 마탑 관할로 처리해도 될까요?"

"... 그렇게 하려무나. 살살."


라이메 현자는 약간의 침묵 끝에 허락했다. 니나는 넓은 바위 앞에 쥐를 몰아넣은 스라소니처럼 싱긋 웃었다.


"예, 스승님."

"얘야, 일단 이것들을 받거라."


니나는 스승이 툭툭 치는 책을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못 보던 고서였다. 라이메 현자는 니나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고서를 잘 보여주지 않고 있었는데 드디어 그 금단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일단은 내가 사람을 보내서 수도 고양이들에게 머물기 마법을 걸어뒀단다. 내일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오늘 중에 두 권 다 읽고 가도록 해라. 그리고 이건 앞으로 꼭 지니고 다니거라."

"와, 진짜 예뻐요. 스승님이 어디 가실 때 하고 다니시던 장식인데 저 가져도 되는 건가요?"


"그래. 허리에 매는 건데 강한 마법 호신부다. 잃어버리지 말거라."


니나는 입이 귀에 걸려서 책과 호신부를 받아서 들었다. 방에 들러 여러 가지 마법용 도구와 향유를 짜낸 고양이 박하 공도 챙겼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려 냄새가 새 나가는 것을 막는 마법을 건 니나는 산을 탈 때 신는 앞코에 동판이 붙은 장화로 갈아 신고 마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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