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손으로 온전히 껴안아 보는 나의 삶, 나의 생.
영원이 될 순간, 삶의 가장 아름다운 흔적
*일부분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2년 초연에 이어, 1년이 채 안되어 우리 곁으로 ‘라흐헤스트’가 돌아왔다. 우리의 향안, 동림, 환기, 그리고 이상. 김환기 작가를 향한 관심으로 시작해 향안에게로 흘러갔던 내 마음은 이 작품을 만난 뒤 어느새 동림과 이상에게도 마음 한 켠을 내어주고 있었다.
김향안은 김환기 그리고 이상의 아내로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예술가들의 아내 김향안. 하지만 김향안은 단지 김향안으로 태어나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스스로 김향안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했으며,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또 치열하게 예술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의 이야기는 우리 곁에 글로 남아있다.
그리고 뮤지컬 ‘라흐헤스트’는 김향안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무대 위에 펼쳐냈다. 변동림의 시간은 순서대로, 김향안의 시간은 역순으로 흘러간다.
김환기를 만나기 전 김향안은 변동림이었다. 그리고 변동림은 이상을 만났다.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 말하는 이상을 향해 변동림은 가방 하나 들고 그에게 갔다. 그를 향한 마음만을 믿은 채 상에게 향했다. 이상은 동림과 결혼한 지 3개월만에 동경으로 떠나고자 했다. 동림은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예술가로서 상이 겪고 있을 그 아픔과 비참함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고, 이상이 날고자 하는 곳으로 그를 떠나보냈다.
동경으로 떠난 이상은 그곳에서 시를 썼다. 그러던 중 불령선인으로 낙인이 찍혀 감옥에 갇히게 된다. 동림에게도 그 소식은 전해지고 동림은 또 한 번, 가방 하나 들고 그에게 향했다. 열 두 시간 기차 타고 여덟 시간 연락선 타고 스물 네 시간 기차를 타고. 다시 만난 동림과 이상. 이상은 종생기를 남기고 동림을 떠났다. 그렇게 사람은 갔고 시는 동림 곁에 남았다.
이상을 보러 가기 위해 수필을 쓰기 시작했던 동림은 수필가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사람은 갔지만 그의 시는 남았기에. 동림은 계속해서 자신의 글을 남겼다. 그러던 중, 동림은 김환기라는 키 큰 화가를 만난다. 그리고 그림과 글을 주고 받는다. 참으로 다감한 환기. 그의 그림엔 따뜻함이 있었다. 동림과 향안은 모두 이별의 아픔을 갖고 있었기에 다시 사랑이라는 감정을 선뜻 인정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이래도 될까, 계속해서 두 사람은 고민했다. 그리고 동림은 환기에게 가 외쳤다.
‘향안, 그 이름을 내게 줘요.’
동림은 그를 만나 향안이 되기로 결심한다. 환기의 아호인 향안. 그렇게 동림은 향안이 되었고 환기는 수화가 되었다. 서로의 향안과 수화. 그들이 다감하게 서로를 부를 땐 어느순간 나도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고 있었다.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픈 지, 그리고 그런 예술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신을 얼마나 아프게 할 것인지 향안은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다시금 그 삶을 용기 있게 선택했다. 계속해서 지나 온 굴곡진 나날들과 그 길 속에서 마주했던 아픔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향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향안과 수화는 그렇게 서울, 파리, 그리고 뉴욕을 지나며 예술을 했다. 향안은 환기를 위해 파리로 먼저 떠나 아뜰리에를 마련했고 개인전을 준비했다. 향안 덕분에 환기는 파리에서도 뉴욕에서도 자신만의 그림을 온전히 그려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환기 옆에서 향안은 계속해서 글을 썼다. 그림에 대해서 수화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어느 날 향안은 수화에게 김광섭의 시를 전해준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수화는 점을 찍기 시작한다. 점 하나에, 선 하나에 그려낸 작은 섬과 친구들과 그리움, 눈물, 그리고 당신과 나. 그림을 그리며 그 누구보다 빛나고 있는 수화와 수화의 그림 속 담긴 향안의 빛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우린 서로 만날 순 없을 것 같아도
연결돼있는 우리
너 하나 나 하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수화가 세상을 떠나고 향안은 또 한 번 이별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녀 곁엔 수화의 그림이 남았다. 사람은 가고 그림이 남았다. 그리고 향안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환기가 잡았던 붓을 잡고 환기가 그림을 그렸던 이젤 앞에 서서 그와 나눴던 시간들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몽블랑, 노트르담, 센트럴파크. 김환기의 아내가 아닌 김향안으로. 그렇게 한 겹씩 쌓인 그녀의 삶은 예술 자체가 되었다.
나의 두 손으로 온전히 껴안아 보는 나의 삶, 나의 생.
김향안의 삶을 통해 우리가 비록 사라지더라도 남게 될 순간의 영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선택으로 그녀 자신의 삶을 만들어냈던 향안을 보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내가 겪었던, 그리고 앞으로 겪을 모든 아픔들이 나를 만들고 있었음을. 향안, 동림, 환기, 이상.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었던 이들처럼 나의 순간도 영원이 되는 순간이 있길 바란다. 그렇게 온전히 내 삶을 꽉 쥐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