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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희 Jan 31. 2024

[책] 긴긴밤(루리)

서로 다른 우리가 만나 각자의 바다로 나아가는 긴 여정

  외형부터 성격까지 단 하나도 비슷하지 않은 두 존재. 그 둘은 서로의 삶 속에 상대방을 조금씩 가져오며 함께 긴긴밤을 보낸다. 길고 길었던 밤이 수없이 지나가는 동안 또 다른 존재가 나의 삶에 들어오고, 그 사이에 수많은 이별을 마주한다. 새로움, 슬픔, 기쁨, 막막함, 분노, 그 모든 감정이 내 안에 있고 모든 걸 겪은 뒤 나는 나만의 바다로 나아간다. 상대방이 없었다면 혼자서는 절대 찾아가지 못했을 그 곳으로 말이다. 


  긴긴밤을 읽으며 참 많이도 울었다. 슬프고, 예쁘고, 아파서. 


“별이 빛나는 더러운 웅덩이”


  노든, 치쿠, 윔보, 그리고 ‘나’. 잘 살아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도 나의 바다를 만나 잘 살아볼게. 그 웅덩이의 빛나는 별을 향해 우리는 긴긴밤을 보내곤 해. 때론 그 긴긴밤이 너무나도 길어서 이렇게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던 적도 있어. 어둠으로 가득한 이 더러운 웅덩이 속은 나에겐 너무 벅찼거든. 저기 저 더러운 웅덩이 속에서 빛나는 별이 보이더라도 거기까지 닿기엔 수많은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나를 지치게 했던 것 같아.


  그렇지만 노든. 덕분에 난 그 긴긴밤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어. 너무나도 힘들지만 이 긴긴밤이 지나고 나면 나의 바다에 닿게 될 거라는 걸. 우리의 매일은 그렇게 나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걸.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건 죽는 것보다 어렵기에 그 어려운 나날들을 버텨 온 노든, 그리고 우리는 다 잘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줘서 고마워.


  노든, 잘 살아남아줘서 고마워. 덕분에 난 나의 파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 사실 난 아직 나의 파도가 무슨 색인지 만나지 못했어. 그렇지만 나도 언젠가 나의 바다를 만났을 때 내 바다의 색깔을 알 수 있겠지? 노든, 너의 초록색 바다에서 언제까지나 행복하길 바라. 오늘 밤은 길지 않길 바라.



p. 15. [코끼리 고아원, 할머니 코끼리가 코끼리로 자란 코뿔소에게]

“하지만 너에게는 궁금한 것들이 있잖아. 네 눈을 보면 알아.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 가. 직접 가서 그 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영영 모를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 네가 떠나는 건 슬픈 일이지만 우리는 괜찮을 거야. 우리가 너를 만나서 다행이었던 것처럼, 바깥세상에 있을 또 다른 누군가도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여기게 될 거야.”


p. 65. [첫 번째 기억]

치쿠와 함께 다니는 날들은 노든이 가족과 함께 다니던 날들을 떠올리게 했다. 노든은 부쩍 아내와 딸이 자주 생각났다. 그 기억은 괴로우면서도 행복했다.

괴롭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기억. 결은 다르지만 네불라가 생각났다. 돌아보면 너무나도 나쁜 기억이지만 그 순간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버릴 수가 없는 기억. 그 때의 내 모습.


p. 81. [망고 열매 색 하늘, 치쿠마저 떠나보낸 뒤 살아남은 노든이 ‘나’에게]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p. 99. [망고 열매 색 하늘]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불운한 알에서 태어났지만 무척 사랑받는, 행복한 펭귄이었다.


p. 104. [긴긴밤]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바위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었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우리가 긴긴밤을 넘어 살아남았기에,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거야.


p. 115. [코뿔소의 바다, 노든과 나의 바다]

“나는 여기에 남을게”
“뭐라고요?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잖아요.”
“저기 지평선이 보여? 초록색으로 일렁거리는. 여기는 내 바다야.”
“그러면 나도 여기에 있을게요.”
“아니야, 너는 네 바다를 찾으러 가야지. 치쿠가 얘기한 파란색 지평선을 찾아서.”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아직 이름이 없는 훌륭한 펭귄, ‘나’. 누군가에 의해 이름지어지지 않은 그 훌륭한 펭귄이 스스로 이름을 부여하고 그렇게 찾아간 자신만의 바다에서 더욱 훌륭한 펭귄이 되길 바라.


p. 124-125. [파란 지평선, 나의 바다를 향해가는 나]

축축한 모래를 밟으며 나는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내 앞의 바다는 수도 없이 부서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

홀로 긴긴밤을 지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지내 온 긴긴밤들은 누군가와 함께 했음에도 길고 길어 나를 지치게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혼자 그 길을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모험을 지나 반짝이는 별을 찾아갈 것이다. 더러운 웅덩이 속 별을 향해.

p. 144 [심사평]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향해 있던 모든 이의 긴긴밤을, 그 눈물과 고통과 연대와 사랑을. 이제 어린 펭귄은 자기 몫의 두려움을 끌어안고 바닷속으로 뛰어들 것이다.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낼 것이며,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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