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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상 May 01. 2023

도시락의 의미

누군가에게는 사랑, 누군가에게는 위로


요 며칠 SNS에 도시락 사진들로 도배가 되는 걸 보니 올게 왔구나 싶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빨리해치워 버리는 게 낫겠으니 어서 견학일정을 잡아주세요 선생님.




엄마 이번에는 어피치 김밥으로 해줘.
(찡긋)



전날 저녁 '긴장감'과 동반하여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부터 도시락전쟁은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알람소리에 전쟁의 서막이 열린다.

10분 더 이불속에서 미적거리는 것은 결코 게으름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순서도그리며 치밀한 작전계획 중이랄까.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들을 한대모아 머리꼭대기로 질끈 동여매고 나니 용맹한 장수가 따로 없다. 앞치마 갑옷을 두르고 전쟁터로 당당히 입성한다.



첫 코스는 밥 짓기.

찬물로 쌀을 바락바락 씻다 보면 잠이 확 달아난다. 취사 버튼을 눌러 백미밥 '34분'을 확인하는 순간 쿠쿠와의 레이스가 시작된다.



미션명 '어피치 김밥을 완성하라!'

스팸을 꺼내 하트모양틀로 찍어낸다. 가장자리부터 알뜰하게 쓰다 보니 3개가 찍혀 나온다. 

파르르 끓는 물에 퐁당. 온천욕을 한바탕 즐기고 나오면 불순물도, 짠기도 빠져나가므로 통조림햄에 대한 죄책감을 이렇게 조금이나마 덜어낸다.



지단용 달걀은 체망에 걸러 알끈을 제거한다. 집에 있는 체망이 너무 작고 촘촘해 한참 걸리기 때문에 조금씩 나눠 부으며 미리 걸러준다. 알끈까지 제거한 것으로 보아 이번 미션 수행을 위한 어미의 당찬 포부와 사랑이 몸소 느껴지지 않는가.


무려 알끈까지 제거한 정성의 지단이므로 뒤집는데 실패는 없어야 한다. 



기억하라 제군들이여.
얇은 달걀지단은 뒤집개가 아니라
젓가락으로 공격해야 큰 부상 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네.


젓가락으로 가장자리부터 살살 달래준 뒤 안쪽으로 서서히 침투한다. 반쯤 들어갔을 때 그대로 들어 올려 달걀을 뒤집는 것이 나의 전략이다.




라이팬 채 들고 달걀지단을 도마 위에 무심한 듯  던진다. 아름다운 달걀꽃으로 재탄생될 축복받은 운명이여! 명심해야 할 점은 지단을 한 김 식힌 뒤에 썰어야 한다는 , 말 잘 듣는 칼을 사용해야 모양이 잘 나온다는 것이다.


제군들이여, 지금 당장 칼을 갈라




지다 가던 할머니가 ‘먹는 거 가지고 지랄들을 하네.’라고 말할 정도는 돼야 비로소 어여쁜 달걀꽃이 완성되는 법이다.




자, 이제 반은 왔다.

쿠쿠와의 레이스는 개뿔. 다 됐다고 떠들어댄지가 한참이다. 밥통에서 터져 나오는 하얀 미스트를 뒤로하고,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문을 살짝 열어둔다. 전쟁터에 부족한 인력보충을 위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들을 흘려보낸다.


옳거니! 흐물거리는 슬라임처럼 비틀거리며 주방을 향해 걸어오는 아이는 눈도 채못뜬채 입꼬리를 씰룩댄다.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아침인사를 나누는 도중에도 손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인다.



고슬고슬 하얀 쌀밥에 소금 톡톡, 참기름 쪼르륵 넣어 간을 한다. 솔직히 이 밥만 집어먹어도 맛있다.


아이가 주문한 ‘어피치 김밥’은 흰밥 가운데 햄 하나를 떡하니 박아 넣으면 끝이다. 이걸 무슨 맛으로 먹나 싶은데 편식이 심한 (내가 낳은) 아이에겐 최고의 메뉴다. 

아삭거리는 오이, 쫀득한 맛살, 김밥의 마무리를 개운하게 담당해 주는 짭조름한 노란 단무지 마저 싫다아이는 김밥 꼬다리를 세상 맛있게도 먹는다.


김밥 위 데코는 아이들과 함께다. 큰 김 한 장을 내어주면 모양펀치와 미니주방가위를 가지고 새벽 미술반 언니들처럼 집중하며 한참을 재밌게 논다.

깨끗한 약병에 덜어놓은 케첩으로 발그레한 볼터치로 마무리해 주면 끝.




요즘 부쩍 엄마와 신경전이 많았던 아이는 귓속말로 “엄마, 사랑해.”라는 말을 남기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부터 서둘러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아침을 깨우는 엄마의 매서목소리가 잠잠하니 평화롭기 그지없다.


현관문 사이로 울려 퍼지는 엄마의 목소리가 우렁차다.


“딸 사랑해, 잘 다녀와.”


쑥스러운 듯 팔을 흔들며 사라지는 아이의 뒷모습에 짠해지는 마음은 왜일까.




운동회 며칠전날부터 밤새 뒤척이며 비가 오기만을 간절히 기도한 어린아이가 생각 나서였을까?


그 흔한 도시락도 가족도 하나 없이 홀로 큰 운동장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친한 친구 가족이 내미는 따뜻한 손길은 전혀 반갑지도 고맙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발 나 좀 모른척해주면 안 될까' 생각뿐.

분노와 슬픔을 꾹꾹 누르며 "괜찮아요." 라는 한마디를 겨우 내뱉고 아이의 장은 터질 듯했다. 도시락 같이 먹자는 그 말이, 가족들끼리 돗자리 펴고 다정하게 모여 앉은 그 모습이 정말이지 소름 끼치게 싫었다. 


어디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었다. 어린아이에게 그 시절 운동장은 어찌나 끝도 없는 미로 같았는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들킬까 봐, 힘이 풀린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풀썩 주저앉을까 봐, 그래서 모두들 나를 쳐다볼까 봐 두려움에 떨던 작은 아이였다.




도시락을 들고 멀어져 가는  아이의 뒷모습에 그 시절의 어린아이가 위로를 받는다. 어쩌면 정성을 다해 건네주는 그 도시락은 내 안의 또 다른 아이에게도 함께 전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국 너에게는 사랑을 주고, 

나에겐 치유를 준 따뜻한 도시락.




벅찬 가슴을 안고 뒤돌아서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눈부신 광경을 마주하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이제 설거지해야지?



설거지는 오후의 나에게 미뤄두고 참치캔 하나를 기분 좋게 딴다. 마요네즈 듬뿍, 청양고추 팍팍 넣어서 김밥 한 줄 맛나게 말아먹어보련다.


토토로스팸은 언니가 만들어줬어요. 나트륨파티 잘하구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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