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에Say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상 Jul 15. 2023

주말에 하이볼 한 잔 할래?



동네 작은 술집이 생겼다.
안주가 싸고, 맛있다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나.
신발가게와 오메기떡집 사이에 야무지게 끼어있는 그곳에 들어가면 맞은편엔 목욕탕과 작은 마트가 있는 오래된 건물뷰가 보인다. 동네 맛집 위치로 이토록 참신하지 않을 수 없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무난하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오픈주방이 눈에 띈다. 안내해 주신 작은 테이블이 유독 꽉 차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사소하지만 센스 있는 것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수납함이라던가 바테이블마다 구비된 휴대폰충전기 같은 것 말이다. 사실 몸만 터덜터덜 이끌고 간 동네주민에게 크게 의미 없는 장치들이지만 그것들을 소소히 안내하는 작은 종이가 정중하고 기분 좋게 다가온다.

별거 아닌 것들에 행복을 느끼는 우리는 그저 별거 아닌 사람들이니까.


메뉴판을 보니 소문대로 안주가 저렴하다.

혹여 양이 적더라고 다양한 메뉴를 조금씩 맛보는 게 훨씬 좋은 J와 나는 주문한 안주가 소인(小人) 양이어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하며 아란치니와 소시지 감자볼, 라구볶이를 주문한다.

하이볼은 종류가 여럿이다. 그중 '알코올이 어려우신 분에게 적극 추천해 드려요'라는 설명을 덧붙여놓은 친절한 매실하이볼은 J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았다. J의 매실하이볼과 유자하이볼까지 주문하고 나서야 따뜻하게 내어주신 핸드타월에 구석구석 손을 닦는다.

지체 없는 주문속도였다.


달달한 하이볼과 곁들임 안주 ©미상


두 잔의 하이볼이 찰랑거리며 우리 앞으로 나란히  배달된다. 얼음이 가득 담겨 보기만 해도 시원한 유리잔을 요란스럽게 부딪힌다. 입으로 내는 "짠!" 하는 짧은 음성과, 눈빛을 마주치며 가벼운 미소를 띠는 것이 우리만의 오래된 건배사다.

J의 들뜬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매실하이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너무나 알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으, 써"라는 말을 삼키듯 조용히 내뱉었으나 듣고 말았다. 행여 내뱉지 않았어도 의 일그러진 표정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J는 술찌(술+찌질이)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한 박스도 거뜬히 먹을 수 있지만, 마음을 안 먹는 거뿐이라고 하는 허세를 처음에는 믿었다. 어쩌면 J는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부터 온몸이 앰버(엘리멘탈 주인공 '불')처럼 타오르는 모습은 J보다 마주 앉은 내가 훨씬 더 자주 봤을 거라 확신하니까.

제로콜라를 다시 주문한 J는 얼음만 빼곡하게 담긴 길쭉한 유리잔에 콜라를 따른다. 두 번째 "짠!"을 내뱉으며 기분 좋게 부딪히는 유리잔 소리가 저절로 흥을 돋운다. 제로콜라를 들이켜고 나서야 "크으"하고 걸쭉한 소리를 내뱉는 J의 귀여운 허세도 왠지 봐줄 만하다.

하이볼은 새콤한 유자음료에 기분 좋은 짜릿함이 한 스푼 들어간 맛이다. 이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메마른 땅 위에 촉촉한 단비가 내린다. 비를 맞은 씨앗들은 어김없이 자라나 '취기'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피어오를 것이다.

내 앞으로 슬쩍 넘긴 J의 청량한 매실하이볼까지 야무지게 털어 넘기는 손목스냅과 활기차게 꺾이는 고개의 협응이 다부지다.

텀블러에 담아 출근길에 상쾌하게 한 모금, 일 하다가 고되면 커피 대신에 한 모금, 상사의 쓸데없는 소리를 흘려보내고 욕을 삼키며 한 모금, 퇴근길에 신나게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에게 노동주는 허용되지 않는가!' 한탄하며 마시는 하이볼은 유난히도 달콤하다.

아쉬운 대로 속에 고이 담아보는 하이볼이 찰랑일 때마다 의 마음도 함께 일렁인다. 






SNS에 오랜만에 사진을 올린다.
이게 다 입에 착착 감기는 하이볼 때문이다.
한 번 입장하고 나면 어김없이 내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곳을 혐오하면서도 기록의 단맛과 공유의 기쁨을 맛보는 나의 이중성에 대해 생각한다.
 24시간 뒤면 사라질 스토리를 정성껏 단장하는 걸 보면 인간심리의 취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런 인간이 바로 나다.

문득 생각한다. 내가 혐오하는 대상이 SNS인지. 아니면 지금 앉아있는 술집의 피드를 굳이 찾아내 태그 하는 쓸데없이 정성스러운 나란 인간인지에 대하여.






술집 피드를 찾아낸 김에 다른 메뉴는 뭐가 있는지, 어떤 음식평이 좋은지 돼지런하게 살핀다. 안주하나를 더 시킬 생각이었다.
왠지 모르게 SNS 게시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시각적으로 빼앗기는 자극이 '사진'이 아닌 '글'에 있다는 것은 나를 꽤나 흥미롭게 했다. 


Instagram @comodo.jeju


마치 사람이 보이는 듯한 투명한 글이 좋다.

가끔은 유명한 작가들의 화려한 글보다 군더더기 없이 써 내려간 누군가의 소소한 일상글에 더욱 마음을 뺏길 때가 많다. 나를 더 쓰고 싶게 만드는 건 보통 이런 순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간에서 만끽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한껏 더 풍성하게 다가왔다. 왠지 모르게 친숙해진 기분까지 드는 걸 보니 '글의 힘'을 다시금 실감한다. (어쩌면 하이볼의 힘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보통 이른 저녁시간에 이곳을 이용한다.

한두 시간 차이로 웨이팅이 생기기도 하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위해 오기 때문에 붐비지 않는 공간에서 편히 즐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J와의 시간은 보통 술 마신다는 의미보다는 식사를 하며 술 한잔 곁들이는 의미가 더 크다. 일반음식점이 아닌 술집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J는 나에게 술을 권하고 나는 J에게 안주선택권을 넘긴다. 술이 들어가면 웬만한 것은 맛이 없을 수가 없으므로 J가 고른 안주는 늘 평타이상이다.



조만간 아란치니 메뉴가 없어진다는 게시글은 꽤나 섭섭했다. 고기를 먹을 때도 냉면보다 밥, 돈가스를 먹을 때도 샐러드보다 밥, 라면 먹을 때도 마무리는 밥을 말아줘야 하는 탄수화물중독자에게 아란치니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안주였단 말이다.
탄수화물과 하이볼의 아름다운 결합을 통해 탄생하는 '상냥함'을 잃는다는 건 나보다 남편인 J에게 더 슬픈 소식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란치니에 곁들여 나오는 참나물무침은 무조건 리필 ©미상



"여긴 젊은 친구들이 많이 오네."


주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과 마주 앉은 나를 의도적으로 번갈아 보는 J의 장난기 다분한 눈길이 계속된다. 본인만 재미있는 장난은 절대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 J가 은근히 나의 심기를 건드린다.

뭐 자주 있는 일이지만 어지간히 불편한 날이 있다.


불편하지만 어쩌겠나. 젊은이도 늙은이도 아닌 채 애매하게 끼어있는 것이 지금의 우리인 것을.






'변화'와 '새로움'을 점점 기피하고 '익숙함'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나에게 익숙한 공간이 돼있을 이곳을 상상해 본다.

결국 익숙함의 시작은 새로움이지 않았을까?


앞으로 이 공간에서의 나를 '단골'이라 칭하기로 했다. 겨우 두 번째 방문이다.

사장님도 아르바이트생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단골이라니. 그저 나 혼자만의 내적친밀감이 높은 이곳은 이제 나의 단골집일 뿐이다.



적어도 킵고잉을 완성할 때까지는 말이다.

'Keep going'을 완성하면 주류 한 병이 무료 ©미상




* 코모도(comodo) : 편리한, 따뜻한, 딱 좋은, 쾌적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스페인어.

사실 듣자마자 도마뱀부터 떠올렸음을 고백한다.

* 어쩌다 보니 여행기(旅行記)처럼 구구절절도 써 내려간 술집 방문기(訪問記)다. 글을 쓰는 사람은 독자를 생각하지 않을 수없는데, 이 글을 쓰며 단 한 명의 독자만을 떠올렸다. 바로 술집 사장님.

이 글을 쓰게 한건 하이볼이 아니라 사장님의 따뜻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와 어떤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사진출처 : https://brunch.co.kr/@lims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