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강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어렴풋이 생각해 보니 잠들기 직전에도 두통을 느꼈지만 금세 잠들어 잊어버린 것 같았다. 공복이지만 일단 두통약부터 먹고 용머리해안 관람시간이 올라오기 만을 기다렸다. 용머리해안 관람시간은 대략 오전 9시쯤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공지된다. 만조나 날씨에 따라 시간이 매일 다르게 정해지는데 오늘은 오전 9시부터 10시 반까지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글이 올라왔다. 아쉬운 마음부터 들었다. 오늘은 오랜 방콕타임을 깨고 밖을 나서 보기로 한 날이었는데 지금 나가도 용머리해안까지는 10시 반은 훌쩍 넘어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만 날은 아니니 안 되는 거라면 빠르게 포기하고 밥부터 먹었다.
밥을 먹으며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산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바다와 날씨, 강수량 등등 자연의 모든 조건이 허락해야만 열리는 곳을 기다린다는 건 그 장소가 아닌 자연의 시간을 기다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당장 필요하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대부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도시와 사뭇 다른 생활이라는 게 느껴진다. 그러나 불평불만을 해도 소용없다. 자연에게 있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만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대는 인간도 사실 별 거 아니구나, 자연 앞에선 그저 티끌인 먼지일 뿐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밥을 먹고 집안일까지 끝마치고 밖을 나섰다. 오늘 용머리해안 관람에는 실패했지만 산방산 탄산온천에 가보기로 했다. 몇 날 며칠을 방에만 있었더니 몸이 좀 찌뿌둥하기도 했고 평소에도 워낙 온천이나 목욕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방문해 보기로 했다. 목욕에 필요한 것들도 소분하여 챙기고,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때수건이 생각났다. 제주에 내려올 때 때수건이 필요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지. 얼른 마트에서 때수건을 산 뒤 탄산온천으로 출발했다.
탄산온천은 내가 자주 타던 버스로 한 번에 간다고 하길래 아무 생각 없이 탔다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무선이어폰에서 왼쪽만 연결이 안 되는 것 아닌가. 초기화도 해보고 업데이트도 했는데 왼쪽이 아예 작동되지 않았다. 이전부터 왼쪽 배터리 효율이 다소 떨어진다고는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어폰이 말썽이니 당황스러웠다. 다행히도 숙소 바로 옆에 삼성서비스센터가 있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에 수리를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담이지만 숙소 위치는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뚜벅이에게 너무 편하고 차로 이동한다 해도 어디든 편히 움직일 수 있다. 다만 서귀포시여서 공항과 거리가 다소 멀다는 게 단점이랄까? 그렇지만 이것도 버스 한 번이면 공항까지 도착하니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다음에 제주여행을 하게 되어도 이 숙소를 택하고 싶다.)
서비스센터를 들러야겠다 생각하며 지도 앱을 켰는데 또다시 이상함을 느꼈다. 나는 지독한 길치인 탓에 초행길을 혼자 다닐 때는 꼭 지도 앱을 켜고 다니는데 버스가 갑자기 알 수 없는 길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같은 버스여도 중간 노선이 다르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간 노선에 탄산온천이 있었다는 것도 버스 안에서 알았다. 심지어 탄산온천 가는 버스가 아니라는 것도 버스 유리창에 붙어있었는데 '산방산' 행이니 이게 맞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어딘지도 모를 낯선 정류장에 내려서 택시로 탄산온천까지 이동했다. 그나마 금방 알아차리고 택시를 탔으니 망정이지 그냥 멍 때리고 계속 달렸더라면 용머리해안은 커녕 탄산온천도 못 갈 뻔했다.
어찌어찌 탄산온천에 도착해서 어제 미리 결제한 쿠폰으로 할인도 받고 노천탕 입장을 위해 수영복도 대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영복도 가져오는 건데 아쉬웠지만 차라리 여기서 대여하는 게 짐 늘리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며 입장했다. 우선 목욕부터 시작했다. 이름에도 걸려있는 탄산온천탕이 기대되었는데 탄산을 느끼기도 전에 물이 너무 차가워서 온탕으로 도망쳤다(...). 결국 온탕에서 몸도 불리고 목욕도 끝냈다. 목욕하는 내내 엄마 생각이 났다. 대부분의 부자, 모녀들이 그렇겠지만 영원한 목욕탕메이트 아닌가. 아마 엄마와 함께 왔더라면 몸을 불리며 엄마랑 떠들기도 하고 서로 때도 밀어줬을텐데 조금은 아쉬웠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커피우유를(꼭 삼각이어야 한다. 그거 아니면 불법이다.) 하나씩 마셔야 한다는 것. 다음엔 꼭 엄마랑 같이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게 바로 어른이 된 딸의 마음인 걸까.
이후 노천탕과 사우나실, 휴게실을 들렀다. 온천이다 보니 사진 찍기는 어려웠지만 탁 트인 노천탕은 꽤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여긴 사진촬영이 가능한 포토존!). 그렇지만 굳이 5천원을 추가로 내고 입장할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노천탕을 찾기는 꽤 어려운 일이니 이것도 경험이다 생각하기로 했다.
설연휴와 한파, 폭설이 지나간 제주의 평화로운 시간. 노천탕은 아담하고 귀여웠다. 그렇지만 재방문의사는 없다. 갑자기 일본 온천을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탄산온천에서 신나게 즐기고 난 다음 버스를 타고 서비스센터로 이동했다. 배가 고팠지만 버스가 곧 도착이기도 했고 근처에는 혼밥을 할만한 곳이 없어서 점저는 숙소 근처에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메뉴를 고민하면서 버스를 타는데 버스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곡이 들려왔다. 나의 영원한 아이돌, 보아언니의 Girls on Top이었다. 언니는 작년 말 가요대축제에서 이 곡으로 무대를 꾸몄는데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멋진 퍼포먼스와 라이브 무대를 보여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끔 인생을 좀 대충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언니를 보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변함없이 저 자리를 유지해오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나도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오래 K팝의 기강 잡아주는 언니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버스는 서비스센터 바로 앞까지 나를 데려다줬고 곧 접수를 진행했다. 기사님께서는 케이스에 대한 업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왼쪽 연결이 잘 되지 않는 이슈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렇다고 당장 이어폰을 바꿀 필요는 없으니 업데이트 이후에도 잘 작동되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솔직히 수리 접수를 하면서도 이제 그만 이어폰을 보내주라고(...) 하실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물건을 어지간하면 쓸 수 있는 데까지는 써보고 정말 안 될 때 버리는 편이다. 그런 이유로 옷도 하나 사놓으면 몇 년은 기본으로 입고, 소모품도 낡아 떨어질 때까지 쓴다. 전자기기도 마찬가지다. 서비스센터에서 가망 없음 판정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최후의 최후까지 쓰다 처분한다. 짠순이어서가 아니다. 무언가를 버리고, 새로 사고, 교체하는 과정이 너무 귀찮기 때문이다. 특히 스마트폰이나 노트북은 거진 하루를 꼬박 써야 한다. 물론 어지간한 데이터는 자동으로 넘어온다지만 디테일한 세팅까지 체크해야 하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워낙 물욕이 없고 돈 쓰는 재미를 잘 못 느낀다(그래서 엥겔지수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건 함정. 먹는 데엔 돈을 쓸 수밖에 없으니 죄다 식비로 소비한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돈의 여러 속성 중 '가능성'이라는 속성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에 쓰는 것보다 모으는 걸 더 좋아하는데 이건 다른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봐야겠다.
어쨌든 수리비용도 따로 없었던 데다가 이어폰을 아직 쓸 수 있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끼며 점저를 먹으러 이동했다. 메뉴는 제주삼다국수의 고기국수로 정했다. 제주에서 무척 유명한 메뉴인데 아직까지 고기국수를 안 먹어봤다는 게 생각나서 오늘 한 번 먹어봐야겠다 생각했다. 숙소 근처 흑돼지고기국수를 주문했는데 국물이 참 맛있었다. 그런데 면이 너무 푹 익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쫄깃하고 꼬들한 면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 점은 아쉬웠지만 이건 각자의 취향일테니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는 맛이었다.
제주삼다국수의 흑돼지고기국수. 국물이 정말 진하고 맛있었지만 면이 아쉬웠다. 자색면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신다던데 내 취향은 아니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마트로 향했다. 우선 나의 필수템인 커피가 떨어졌고 찬거리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커피는 고민하다가 미니 스틱 100개 묶음을 샀다. 분명 다 못 마시고 가져가겠지만 지금까지 마시던 커피는 너무 맛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 못 마시면 그냥 서울로 가져가면 되니까 남으면 남는 대로 챙겨갈 생각이었다. 반찬거리는 뭘 사볼까 하며 반찬코너를 서성거렸는데 생각해 보니 이걸 사가도 내일모레면 친구들이 단체로 내려오니까 분명 며칠 냉장고에 있다가 다 상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부챗살 한 팩을 샀다. 적당히 밥과 나눠먹으면 내일까지는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골랐다.
그렇게 무얼 먹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마트를 누빌 무렵, '그만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먹고' 살겠다고 마트까지 왔으면서 그만 '살겠다고' 생각하다니. 그 생각에 잠겨 부챗살 한 팩과 커피 한 박스가 담긴 카트를 굴리며 마트 몇 바퀴를 돌았다.
조금 지친다고 생각했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터널을 걷는 기분이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터널. 비단 학위나 졸업만을 터널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다. 인생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에서 나는 대체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성인이 된 이후 내가 주체적으로 내렸던 크고 작은 선택들의 총합이 지금이라면 나는 정말 올바른 선택을 내리며 살아온 것일까. 어쩌면 미성년이었을 때 나의 의지와는 상반된 선택을 한 이후 그때의 터널 속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 터널을 어떻게 해서든 걸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처럼 나를 덮쳤다.
그래, 이건 아마 하루종일 이어지고 있는 두통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온천에 다녀와서 노곤해진 몸 상태로 사람 북적이는 곳을 돌아다니니 피곤이 몰려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써 나의 감정을 외부 탓으로 돌리며 마트를 빠져나왔다. 숙소에 도착해선 가볍게 움직이고 씻었다. 가방 정리도 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여전히 소용돌이 치고 있다. 이 감정들은 아마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이 여유로운 상황이래도 당장 이 어지러운 감정들을 한데 모아 이겨내려고 하지는 말아야지. 적절한 때를 기다리되 회피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마트에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회색빛 구름이 뒤덮인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바로 윗 사진을 찍고 도보 10분도 안 되는 거리의 숙소 앞에서 다시 찍은 하늘. 그새 하늘빛으로 변해버린 하늘. 제주의 날이란 참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