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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Feb 01. 2023

24. 외돌개, 황우지 선녀탕, 블라썸, 천제연폭포

우당탕탕 무계획 제주여행(24) 하늘과 맞닿은 바다 (230201)

얼마 전 지인에게 추천받은 외돌개가 궁금했다. 그래서 외돌개와 그 옆에 있는 황우지해안을 가보기로 했다. 이쪽은 내가 지금까지 타던 버스들과는 다른 버스를 타야 해서 살짝 걱정했는데 일단 나가보자 생각했다. 침대에서 뭉그적대다 나오니 벌써 12시였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약 10분 정도 기다려 버스를 탔는데 제주버스의 신기한 점은 기사님들께서 퀵서비스 대행도 함께 하시는 것 같았다. 종종 어떤 정류장에서 물건을 건네주시면서 돈을 받거나 하는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는데 오늘도 그런 경우를 보았다. 어쩌면 부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삼매봉 정류소에서 내렸다. 외돌개까지는 정류장에서 좀 더 걸어야 했다. 꽤 오래 걸어야 했지만 그래도 얕은 내리막길이라 걸을 만했다.

외돌개 입구까지 내려가던 길. 오늘 역시 날이 무척 좋았다.


걷다 보니 외돌개 입구가 나왔고 외돌개 방면 표지판 덕분에 편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산길이지만 그래도 잘 정리된 길이어서 편하게 걸을 수 있었고 나있는 길대로만 걸으면 되니까 길 헤멜 걱정도 없었다. 산속을 걷고 있자니 공기도 확실히 맑았고 기분도 좋아졌다.

외돌개 방면을 친절히 알려주던 표지판. 그리고 외돌개를 보러 가는 길에 펼쳐졌던 눈부신 바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외돌개를 만날 수 있었다. 사진으로는 조금 작아 보일 수도 있고 역광이라 실제보다 더 어둡게 나오긴 했지만 망망대해에 우뚝 솟아있는 외돌개의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믿음직한 모습이었다. 장군바위라고도 불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자태였다. 그리고 산 위에서 바라본 바다는 에메랄드와 하늘빛 그 어딘가의 빛깔이었다. 바다는 매번 다르고 매번 새로워서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다. 이번 한 달 여행의 콘셉트를 '당신과 나의 바다'라고 정했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정한 것 같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외돌개의 모습. 오늘도 너무 예쁜 윤슬.


외돌개를 구경하고 좀 더 가보니 공원이 나타났다. 여기가 삼매봉공원인가 싶은데 정확하진 않다. 간단한 운동기구도 있었고 대장금 촬영지라고 안내하는 팻말도 보였다. 대체 언제적 대장금이냐 싶었지만 나도 어릴 때 본방사수했던 기억이 생생해서 절로 미소가 나왔다. 

한적했던 공원, 그리고 빼꼼히 보이던 한라산. 역시 난 럭키걸이야.


공원 한 바퀴를 둘러보고 다시 외돌개 전망대로 걸음을 옮겼는데 외돌개 전망대 맞은편에 있던 무덤을 발견했다. 사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오션뷰를 차지할 수 있다니. 고인께는 무척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이거야 말로 호사 아닌가 싶었다. 여기 말고도 이 근처에는 무덤이 많던데 무덤이 모여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혹시 이전에는 공동묘지였을까?

외돌개 전망대 맞은편에 있던 무덤. 내 묫자리가 이렇게 명당이긴 어렵겠지? 그렇다면 그냥 바다에 뿌려주었으면 좋겠다.


외돌개는 모두 구경했으니 황우지해안으로 향했다. 그러다 가는 길에 넓은 절벽과 돌탑이 보였다. 사람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있길래 궁금해져서 들러보았다. 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는 돌탑에 나도 소원을 빌며 돌 하나를 얹었고 절벽에서 보이는 바다를 한동안 감상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틀어둔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듣게 되었다. 무어라 표현이 어렵지만 이 절벽과 바다에 너무 잘 어울리는 곡이라는 생각이 들어 노래가 끝날 때까지 감상했다. 그리고 사진으로는 다 표현이 어렵지만 하늘과 바다가 데칼코마니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만큼 바다의 색은 푸르렀고 하늘 역시 바다만큼 푸르렀다.

서귀포를 주제로 한 노랫말이 새겨진 비석은 어느새 돌탑으로 변했다. 그리고 절벽에서 내려다 본 바다. 바다가 너무 예뻐서 자꾸 앞으로 걸어가면 어쩌지 고민스러울 정도였다.


다시 황우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만난 황우지 선녀탕. 85계단을 내려가면 있다길래 '내려가보지 뭐' 하는 생각으로 아래를 보았더니.. 850계단같은 85계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맞는 건가 순간 고민스러웠지만 이때 아니면 언제 내려가보겠나 싶어서 조심히 내려갔다. 가는 길 내내 계단 폭이 너무 커서 긴장한 채로 계단을 내려갔다.

황우지 선녀탕 입구. 난 내려갈 때만 해도 올라갈 때 이렇게 힘들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힘들게 계단을 내려가고 마주한 선녀탕.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선녀들이 내려온다면 여기서 목욕할 만하다 싶었다. 탕에 고여있는 물이 너무 맑고 예뻤다. 더 깊은 탕도 제대로 보고 싶었는데 사람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돌길에 발목이 나갈 뻔했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에서 구경하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내가 아무리 경험주의자라지만 선녀탕 바위에 발목 나가서 119를 부르고 싶지 않았다(...).

말 그래도 돌밭이었던 황우지 선녀탕. 그리고 탕의 빛깔이 독특해서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엄청난 돌밭도 인상적...


황우지 선녀탕을 구경하고 겨우겨우 85계단을 올랐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이번 여행에서 체력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순간 아닐까 싶었다. 그래도 선녀탕까지 구경했으니 뿌듯함도 느꼈고 이후 황우지해변을 따라 걷던 길에 황우지 12동굴을 보면서 안타까움도 느꼈다. 태평양 전쟁 때문에 제주도민들은 얼마나 험한 고생을 했던 걸까.

황우지해안은 따로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이 절벽을 따라 걷는 바다가 황우지해안인 것 같았다.  그리고 멀리서 보이던 12동굴. 동굴을 보는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제 외돌개와 황우지해안을 다 돌아보고 나서 천지연폭포로 이동하고자 했다. 어제와 오늘 내내 돌길을 걸었더니 다리가 계속 피로했는데 다행스럽게도 천지연폭포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함정은 30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이걸 기다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다른 루트를 보니 아까 내렸던 버스정류장으로 꽤 오래 걸어야 했고 그 버스도 텀이 짧은 버스는 아니라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그래도 제주버스는 고지된 시간에 정확히 버스가 도착하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가 힘들진 않았다. 종종 벤치에서 멍 때리는 나에게 타라는 듯한 빈 택시의 빵빵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마저도 그러려니 하고 주저앉아 있었더니 버스가 도착했다. 관광버스여서 그런지 승객은 나뿐이었다. 왠지 버스를 전세 냈다는 기분으로 천지연폭포를 향했다.

전세 낸 기분으로 이동했던 880번 버스. 기사님께서도 친절하셨고 안전운전 해주셔서 감사했다.


버스를 타고나니 배고픔이 밀려왔다. 아무래도 오늘 아침밥이 좀 적어서 그런가 싶었다. 버스에서 천제연폭포 혼밥을 검색했는데 파스타가 나왔다. 원래 파스타를 엄청 좋아하는 편이라 반가운 마음에 여길 가려고 했는데 당분간 파스타는 안 하시고 카페만 하신단다. 슬픈 마음으로 다른 곳을 뒤져보았는데 다행스럽게도 파스타를 파는 브런치 카페를 발견했다. 역시 무엇 하나에 꽂히면 꼭 해보고야 마는 나. 이 정성이면 논문 열 편은 썼을 것 같지만... 이런 생각은 일단 외면하기로 했다. 그리고 논문에 쏟았어야 할 정성을 작가의 산책길을 오르는 데에 쏟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 여기 와본 적 있는 듯하다. 예전 직장 회사 워크숍 때 와봤구나.

작가들은 역시 남다르다. 이런 길을 산책길로 다닌다니. 그리고 오르는 내내, 오르고 나서 보이는 풍경이 너무 낯익었다. 나 여기 와봤네. 와본 거 맞네.


오늘 정말 체력소모 장난 아니었다. 2차 등산까지 마치고 나니 내게 낯익던 길이 나와 허탈했지만 파스타를 맛볼 생각에 서둘러 걸었다. 목적지는 브런치 카페인 블러썸 꽃이피다였다. 꽃이 콘셉트인 곳답게 식용(이겠지?) 꽃을 얹어주신 게 포인트였다. 솔직히 맛은... 모르겠다. 입맛 허들이 굉장히 낮은 편인데도 먹는 내내 맛있다는 생각도 못했고 크림소스 기름이 분리되는 바람에 더더욱 별로였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고 먹는 순간엔 맛있게 먹었다. 문제는 브런치를 쓰고 있는 이 시간까지도 소화가 안되어서 저녁을 못 먹었다는 점. 내일 성산 가고 싶은데 살짝 걱정된다. 나처럼 튼튼한 위장도 몇 없는데 설마 소화 안돼서 병원신세 지는 일은 없겠지?

카페 블라썸 꽃이피다. 내부 인테리어나 한라산 뷰, 아메리카노도 좋았지만 내가 기대했던 까르보나라는 별로였다. 제발 내일 아침까지 소화가 다 되었으면 좋겠다.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식사도 마치고 책도 보면서 시간을 잘 보냈다. 이제 기력이 좀 충전되었다고 느꼈을 때 천지연폭포로 자리를 옮겼다. 이 곳도 입장료는 2천원이었고 초입에 오리들을 만났다. 그리고 해가 살짝 떨어질 때쯤 거닐게 된 길이 참 예뻤다. 

 천지연폭포로 향하던 길. 떨어지는 해가 보일 듯 말듯 한 하늘이 너무 좋았다.


길이 예뻤던 것과는 달리 천지연폭포의 모습은 기대했던 것만큼 웅장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리고 폭포 앞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찍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도 뭐 다들 이런 곳에선 기념사진 한 장씩 남기고 싶어할테니까. 사람 많은 건 그러려니 했고 한 바퀴 둘러본 뒤 바로 나가는 길로 향했다. 

사람이 많았던 천지연폭포. 그리고 귀여웠던 가랜드. 언젠가 내 집이 생긴다면 저런 가랜드로 꾸며보고 싶다.


이렇게 오늘의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폭포에서 숙소까지 바로 가는 버스가 운 좋게 금방 와서 탈 수 있었다. 이 버스를 타고 가자니 예전 회사 워크숍에서 들렀던 이중섭 거리와 거닐었던 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특히 그때도 촌스러워 보였던(...) 오렌지호텔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보니 웃음이 났다. 이후엔 해가 떨어지는 하늘을 버스에서 시시각각 지켜보며 감동받기도 했다. 버스 안이라 차체가 흔들리다 보니 사진을 남기기엔 어려웠지만 사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엔 카메라를 꺼내드는 것보단 그냥 그 순간을 충분히 누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낌없이 오늘의 일몰을 누리고 나니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오늘 하루도 자알 보냈다.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 찍은 오늘의 일몰. 개인적으로 일출보단 일몰을 좋아한다. 일몰을 보고 있자면 오늘 하루도 잘 보낸 나에게 해가 주는 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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