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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May 13. 2023

Live with 와인(2) - 와인만 마시는 이유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나에게 와인은 음식이다. 전문용어나 지식이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와인은 나에겐 말 그대로 매일 먹는, 다른 음식과 곁들여 맛을 내는, 하지만 중요한, 없으면 안 되는…하나의 음식 종류다.


밥이나 국수나 디저트 같은 음식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뇌와 기분에 독특한 자극을 준다는 점이다. 알코올이니까 취기가 돌아 그렇게 느끼는 거지, 라고 하겠지만 음…맞으면서도 아니다. 마치 반려동물이 위로를 주듯, 어떤 그림과 음악을 접했을 때 나만이 느끼는 잔잔한 행복이 있듯, 와인은 그런 대상이다.

 

미국에 연수 온 뒤 꼭 한 달째 되던 날 플라스틱 와인잔에 미니 스파클링와인(미국산 '코벨')으로 혼자 원룸에서 자축했던 날이 기억난다.

기자가 된 뒤론 나름의 문화(?) 탓에 소주와 막걸리, 소폭을 많이 마셔봤지만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늘, 한결같이, 언제나 나의 최애 술은 와인이었다.     


흔히 와인을 즐긴다는 사람들은 그 맛을 어려운 외국말이나 단어들로 현기증나게 표현하던데 난 그럴 이유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어떤 음식이, 그걸 좋아한다고 막 성분을 다 분해하고 수백 가지 이름을 외가며 어쩌구저쩌구 지식을 자랑하면서 먹는단 말인가. (맛 떨어지게스리!) 하지만 분명 내가 모든 주류, 심지어 모든 음식 중에서 와인을 좋아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와인 좋아하면 사치스러운 성격이다’ ‘된장녀다’ 이런 오해를 많이 받아서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본 거다.     


자, 내가 와인을 사랑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포도로 빚은 와인은 농산품이다. 기성품이 아니다. 어떤 농작물도 모양과 성분이 똑같은 공산품이 될 순 없다. 사람도 낳아 준 엄마·아빠에 따라 다르지 않나. 심지어 같은 부모에게 난 형제자매가 모두 다르듯 와인도 저마다 다르다. 같은 땅뙈기라도 그해 기온·강수량·일조량 등에 따라 맛이 확 변한다.

같은 회사(생산자)가 만든 브랜드인데도 굳이 몇 년 산이네, 몇 년 산이네 하는 빈티지, 즉 생산연도(정확히는 그 와인을 만든 포도를 수확한 해)를 들먹이는 것도 잘난척하려는 게 아니라 포도 상태가 2019년이 다르고 2020년이 다르고 2021년이 달라서 그렇다. 말 그대로 ‘농사’니까.     

미국 나파밸리의 유명한 와이너리 '파니엔떼'에서 바라본 포도밭. 지난가을 모습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것저것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될수록 다양하고 새로운 걸 찾게 마련이다. 천편일률적인 건 안전하긴 해도 재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와인은 조금씩 모두 다르니 재미가 있는 거다. 사람(생산자)의 기술도 한몫하겠지만, 자연조건에 따라 늘 다른 향과 맛이 나온다니…전문가들이 그 향과 맛을 어떤 용어로 표현하든 상관없이 ‘와, 이건 좀 다른데?’라는 내 느낌만으로 와인은 충분히 재미있는 음식이다.      


와인은 또 다른 재미를 위한 방아쇠가 될 수 있다. 일종의 촉매제라고나 할까. 서구권에선 오페라·발레·뮤지컬 등 공연장이나 미술관에 가면 꼭 있는 게 ‘샴페인 바(bar)’다. 샴페인만 파는 건 아니고 레드나 화이트와인도 함께 있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가볍게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장소다. 왜 그럴까? 취해서 공연장에서 난동을 부리라고?? 결코 아닐거다.     

지난 2월 여행한 시카고의 발레공연장에 마련된 샴페인 바. 조프리 발레단의 '안나 카레니나'를 봤었다.

경험상 와인은 적당히 조금 마시면 예술적 감성을 확 끌어올려 주는 음료다. 맞다. 부인하지 않는다. 알코올 때문에 취지가 올라서 그렇다. 하지만 그 취기란 게…뭐랄까, 소주나 맥주를 마셨을 때의 취기와 다르다.      

와인의 알코올도수는 대게 9도에서 15도 사이다. 체질상 술을 아주 못 마시는 게 아니라면 한 잔 정도 마실 경우 성인에게 그다지 치명적인 도수는 아니다. (소주가 16~23도, 맥주가 4~5도 정도 된다)


와인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당연히 취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와인을 마시고 정말 취해버리는 건 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와인은 인사불성 취해서 이소리 저소리 지껄이며 휘청거리고, 얼굴 벌게지며 눈에 초점을 잃고, 함께 있는 사람들을 긴장시키거나 신경쓰게 하고,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라고 있는 음식이 아니다. 와인은 연약한 껍질을 가진 포도 알갱이들이 그러하듯, 자연이 임의로 준 선물같은 음식을 받아먹으며 잊고있던 감성, 아름다운 기억,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지 느끼라고 있는 음식이다.       


어떤 물질이 뇌를 마사지한다고 한다면(결국 우리의 생각·감정은 모두 뇌가 하는 일이니까) 와인은 아주 섬세하고 천천히, 결코 공격적이거나 단순무식하지 않게 그 작업을 해내는 것 같다. 뇌를 자극시키는 마법의 물약 같달까.      

와인을 마실 때 자연스럽게 코로 느껴지는 포도향기가 그 시작이다. 그 뒤 액체가 입 안에 들어오면 미각을 느끼는 혀와 위아래 높이가 있는 동그란 입모양을 골고루 거치면서 아주아주 다양한 맛들이 난다. 그리고 이내 남들은 모르는 내 뇌에 저장된 어떤 기억과 마음상태를 자극하는 거다. 이름 모를 꽃향기, 흙내음, 오크(참나무)같은 나무향, 아주 흐릿하게 비릿한 바다냄새, 귤이나 라임, 레몬같은 시트러스향, 아무튼 농산물이자 시간을 두고 만든 발효음식답게 마음만 먹으면 여러 가지 자극들을 잡아낼 수 있다.


마치 음악이 그렇듯, 그중에 어떤 아주 작은 요소가 과거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고 내 마음, 심지어 내 몸 상태와 잘 들어맞아 최고의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술을, 심지어 내가 보고 싶어서 돈 내고 온 예술을 즐기게 되면 그 감동과 감상의 즐거움이 배가 되는 거다. 그래서 난 미국에 와서도 수많은 뮤지엄을 갈 때 늘 약간의 와인을 마신 뒤 감상한다. 돈을 아껴야 할 때면 전날 마트에서 장을 봐 둔 와인을 텀블러에 담아가서 미술관 앞에서 좀 마시고 들어가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여러 번의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다. ㅎㅎㅎㅎ     

미국 샌디에이고 뮤지엄의 <The Young Shepherdess (1885)>

집에서 혼자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도 와인은 특별한 조력자 역할을 한다. 얼마 전 생일 때도 집에서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일정과 가격 때문에 직접 볼 수 없었던 ‘백조의 호수’ 발레 공연을 와인과 함께 봤다.

임윤찬이나 조성진 등 눈물나게 아름다운 우리나라 천재 피아니스트의 음악도 와인 한 잔과 함께 하면 그보다 더 특별한 감상이 될 수 없다. 구체적으로 표현해 보라 하면 공연을 접하는 그 순간, 상상력이나 몰입감이 확 높아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껴뒀던 음악이나 영화를 볼 때는 우선 몸과 마음상태도 중요하겠지만(머릿속이 심란하면 제대로 된 감상이 될 수 없다), 어떤 와인을 마시며 감상할 지도 생각해 둔다.      

수많은 미술가·작가·작곡가들이 와인을 사랑한 것도 이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감을 떠올리고 그것을 증폭시키는 데 와인만큼 멋진 역할을 하는 음식이 없는 거다. 물론 그들 중엔 그러다 알코올에 의지해 버리고 중독자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그건 결코 와인 팬으로선 바라지 않는 결과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살아야지 결코 어떤 것에 휘둘려선 안된다.     


부모님이나 나를 생각해 주는 친한 친구들은 내가 와인 예찬론을 펼치면 걱정한다. 술은 좋지 않다고. 당연하다. 어떤 음식이나 취미라도 몸과 마음의 건강에 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 해야 그 장점을 말할 수 있는 거다. 심지어 모두가 권장하는 운동도 과하거나 집착이 되면 해롭다고 하지 않나. 나는 자칫 외롭고 단조로울 수 있는 싱글의 삶을 풍요롭고 감동스럽게 해 주는 와인을 사랑한다. 그래서 단순히 취하게 하고, 몸을 상하게 하는 그런 물질로 취급받게 하고싶지 않다.

     

연수중인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물랭루즈' 뮤지컬 공연장에 마련된 와인바.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와인은 사람들과 나눠 마실 때 좋은 술이라고 한다. 그 말도 정말 맞다. 하지만 내게는 혼자 마실 때도 솔직한 내 감정과 기억을 마주하게 해 주는 친구같은 음식이다.

내가 그때 참 즐거웠고 힘들었구나, 그림 속 저 여인은 오래보니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구나, 이 음악은 이 부분에서 정말 울컥하는구나, 마음속 걸렸던 일들은 그냥 흘려보내자, 까짓 거 좋은 면만 보고 내일을 또 살아보자, 인생은 살 만한 거다, 아름답고 맛있고(!) 어쩌면 앞으로 좋은 일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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