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지난달에 미국 텍사스에서 한인교포 가족 3명이 총기난사로 숨졌다. 이 중엔 3살짜리 아이도 있었다. 이번달엔 시애틀에서 대낮에 한인 가족이 총을 맞아 임신 8개월 부인이 사망하고 뱃속 태아까지 숨졌다.
맞다. 고작 1년이지만 살아보니까 미국은 (적어도 나에겐) ‘무서운’ 나라다. 매달 여러 명이 죽고 다치는 총기 사망 사건이 보도된다. 진짜 무서운 건 상당수가 개인 사이의 갈등이 아닌 ‘묻지마 살인’이라는 점이다. 피해자도 아시아계를 포함한 비주류 인종이나 여성·노인·아이 같은 사회적 약자가 많아지고 있다.
나는 미국에 인종차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여기서부터는 개인적인 느낌이고 경험이다. 일단 영어하는 걸 들었을 때 외국인이란 게 드러나는 경우는 가장 먼저 차별의 타깃이 된다. ‘아, 얘는 외국인이구나’라며 도와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미국인도 많지만, 무시해도 되고 속여도 되고 함부로 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도 많다.
특히 흑인들은 특유의 리드미컬한 발음과 악센트가 있는데 그걸 한 번에 못 알아들으면 나에게 한숨을 쉬면서 무시하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다. 마트에서 계산하거나, 산책길에서 만날 때 다른 사람에겐 인사하면서 내가 인사하면 대꾸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머쓱하고 굉장히 기분 나쁘다.
한 번은 LA에서 버스를 탔는데 모바일 앱 결제 바코드를 어디에 댈 줄 몰라서 두리번거렸더니 흑인 여자 운전기사가 “너 말은 할 줄 아니?(Do you speak?)”라고 쏘아붙이며 승객들 앞에서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는 꽃가루에 기침이 나고 물 먹다 사래가 들려서 기침을 해도 나를 바이러스 취급하며 피하거나, 안 쓰던 마스크를 찾아 끼며 대놓고 눈치를 준 적도 많다. 심지어 이 비싼 월세를 내고 사는 아파트 관리실 직원들조차(이번에도 흑인이다) 내가 계약 관련 용어를 잘 못 알아듣거나 다시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면 아주 귀찮다는 듯, 그것도 모르냐는 듯 불친절하게 군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겠지만 “내가 여기서 돈 쓰면서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솔직히 더럽고 치사하다…. 나이 들어 외국생활하는 거 아니라는 한 선배의 말이 와닿는다.
“왜 흑인들이 유난히 아시아인을 차별하는 거예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건 안다. 근데 내가 겪은 게 주로 그랬다) 어느 날 미국에서 30년 이상 산 교민분께 물어봤다.
그분 말에 따르면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흑인들은 슬픈 역사를 지녔다. 잘 살고있던 자기 땅, 자기 나라에서 백인들에게 끌려와서 노예로 너무 많은 세월을 고생하며 힘들게, 사람대접 못 받고 살았다.
그런 고통의 세월을 겪고 지금은 인구로 보면 백인 못지않은 ‘미국 주인’이 됐다. 흑인들 스스로도 ‘우리가 미국이란 나라를 일궜다’ ‘우리는 대접받아야 한다’는 자부심이 상당하다. 실제로 흑인 대통령까지 나왔으니 이제 미국에서 흑인이란 이유로 제한받는 지위나 직업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런 와중에 미국에선 히스패닉이나 아시아계 인구수도 빠르게 늘어났는데, 특히 한국·중국·일본 등 동아시아인들은 교육열이 강하고, 부지런히 죽어라 일하고 공부하는 민족성과 문화 때문인지 미국 사회에서 엘리트 계층이 되거나 고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인구수 자체는 흑인이나 히스패닉보다 적지만 소위 ‘성공한 사람’ 비율은 동아시아계가 훨씬 높아진 거다.
자연스럽게 아시아인이 고용주가 돼서 흑인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흑인들 입장에선 “고생은 우리가 다 했는데 뒤늦게 굴러온 아시아인들이 주인 노릇을 한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단 거다. 백인에게 지시받는 것보다 아시아인에게 지시받는 게 더 못마땅한 심리다.
둘째, 어쩌면 흑인·히스패닉·아시아인은 모두 백인들에게 차별과 수모를 겪은 ‘동지’라고 볼 수도 있다. 분명 이런 비주류 사이의 동병상련 의식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흑인들이 볼 때 아시아인들은 이민 초창기에 세탁소·식당·슈퍼마켓 등을 운영하며 같이 고생해 놓고, 돈 좀 벌고 자식농사 잘 지어 사회적으로 성공한 뒤엔 입을 싹 닫는다, 그런 인식이 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돈은 우리(흑인)들 상대로 벌어놓고, 사는 곳은 백인들이 사는 고급 주거단지에서 살며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에 애들을 보내며 ‘이제 너희랑은 레벨이 달라’”라고 생각한단 거다.
흑인들 입장에선 히스패닉에 비해 아시아인들은 올챙이 적 생각을 안 하고, 마치 처음부터 잘 살고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것처럼 자신들과 선을 긋고 생활하려는 것처럼 보인단 얘기다. 지난 1992년 LA 흑인폭동 때도 흑인들이 한인 슈퍼마켓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한국인을 ‘배신자’라고 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인종차별은 미국사회가 가장 금기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나지 않게, 소극적인 방법으로 차별이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경제성장이 예전만 못하고 먹기 살기 어려워지면서 그 불만이 인종차별이란 형태로 자주 튀어나오고 있단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빈곤한 백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된 게 결정적인 증거다.
사람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라…자신의 처지가 힘들면 그 탓을 누군가에게 돌리려는 본성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강자가 아닌 사회적 또는 신체적 약자들이다. 현실세계에서 의적 로빈후드나 홍길동은 드물다. 자기보다 더 약한 사람에게 화를 풀고 성질을 낸다.
한국에서도 부쩍 이런 범죄가 늘어가는 것 같다. 우리나라야 인종차별 범죄는 드물겠지만, 대신 노인과 여성들은 이미 두려워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아무런 이유없이’ 구타나 폭력을 당하고, 심지어 사망에 이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엔 남에게 원망사지 않고 착하게 사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살아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해를 당할 수 있는 험악한 분위기가 생겨나고 있다.
그럴수록 미국이든 한국이든 내 가족만 챙기고, 나와 비슷한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살고, 우리 그룹 자식들만 다니는 학교에 보내는 현상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 밖의 사람들과는 철저히 물리적·심리적 담을 쌓는 거다. 그들을 무시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들이 무서워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사람이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가장 믿지 못하고 경계하는 그런 세상이 돼 가고 있는 거다.
결국 정치인이나 기업인은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거다. 하지만 변색되고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건 결국 일반 시민들이다. 그런 면에서 미국의 많은 시민들은 지금까지 미국이란 나라를 번영하게 한 핵심 가치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려고 노력하는 분위기다. 자유·평등·포용성·정의가 바탕이 된 편견없는 사회 말이다.
내가 사는 노스캐롤라이나도 상대적으로 중산층 백인들이 많이 거주하는데, 대학 도시들이 많아서인지 집집마다 이런 가치들을 담은 팻말을 놓은 곳들이 많다. 우크라이나와 관련이 없는데도 우크라이나 국기를 집 앞에 내건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이 집에는 미움이 없다(HATE HAS NO HOME HERE)’ ‘장애는 존중받는다(DISABILITIES ARE RESPECTED)’ ‘다양성은 축하할 일이다(DIVERSITY IS CELEBRATED)’
이런 글귀를 보다 보면 타인에게 전하려는 말인 동시에 ‘나부터 늘 기억하자’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 같아서 왠지 더 마음에 울림이 있다.
인간의 선한 면은 높은 사람이 설파하고 지시한다고 만들어 지는 게 아니다.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식이 모여 공감이라는 희망이 맺히고 선한 말과 행동이라는 결실을 맺는 것 같다.
우리가 많이 배우려 노력하고 자식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하려는 것도, 결국 나와 내 자식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데 동참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