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Jul 10. 2023

‘내가 영어만 좀 더 잘했다면?’…글쎄요.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미국에서 정을 붙이고, 소속감을 느끼며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뭘까.

문화? 역사? 정서? 인종? 아니다…나는 단연코 ‘영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많다. 한국에도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아이들은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영어를 배우고, 유명한 영어유치원에 들어가려고 시험까지 준비한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미국에서 생활해 보니 우리가 한국에서 ‘영어를 잘한다’고 하는 것과 진짜 ‘영어로 사는 것’에는 확실히 큰 차이가 있다. 물건을 사고, 커피를 주문하고, 이게 뭐냐고 물어보고…이런 해외여행용 영어(^^)는 큰 의미가 없다. 영어 단어나 숙어를 많이 알고, 발음이 좋고, 이런 것도 부수적이다.      

미국 유명 커피 브랜드 '블루보틀' 카페에서 각자 볼 일을 보는 사람들.

진짜 영어는 ‘내가 필요할 때나 준비된 상황에서만’ 말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궁금하거나 원해서 말을 걸어올 때에도 바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가지고 대화하고, 그때그때 내 느낌과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언어가 있는 목적이 그런 거니까.      


나는 영어를 좋아한다. 예전 시절이라 비싼 사교육이나 어학연수는 못했지만 디즈니 만화와 팝송으로 영어를 배웠다.  영어를 쓸 때 단어보다는 문장으로 말하고, 심각하지 않은 주제라면 통역없이 인터뷰한다. 미국으로 연수 온 것도 언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1년 가까이 생활하다 보니, 내 사랑 영어가 오히려 싫어졌다. 하하. 정확히 말하면 ‘영어로 살아가는’ 건 영원히 불가능하겠다는 확신(!)이 든다.        


한국인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서울·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 전국 모든 지역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 상대가 음식을 씹으며 웅얼거려도, 작게 속삭여도, 아이나 어르신의 발음이 부정확해도 대충 다 알아듣는다. 카페나 지하철, 공항에 멍 때리며 앉아있어도 안내방송이 다 들린다.      


그래서 미국에서 지내며 한번 시험해봤다. 혼자 산책로를 걷거나 어떤 장소에 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들릴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 들리는 말도 많지만 안 들리는 말이 훠어~~얼씬 많다.


일단 말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고 영어의 리드미컬한 강세도 있어서 말의 뜻이 물결치는 문장 속에 가려지는 느낌이다. 나이드신 분들이 천천히 하시는 말은 그래도 꽤 들린다. 반면 대학생들이 자기네들끼리 수다떠는 건 따라잡기가 어렵다. 한 번은 바로 옆에서 중년 흑인 여성이 특유의 발음으로 전화통화를 하는데, 정말 거의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살바도르 달리 미술관에서 도슨트가 관람객들에게 설명하는 모습. 어르신들이 천천히 하는 말은 그래도 꽤 알아듣기 쉽다.  

내가 이렇게 영어가 안 됐던가, 현실파악이 됐다. 얼마 전, 비행기를 타고 노스캐롤라이나 아파트로 돌아오는데 바로 뒷자리에 어린 남자아이가 엄마 아빠와 함께 탔다. 아가 특유의 혀 짧은 발음을 보니 3~4살쯤 된 것 같았다.      

앉아서 동화책을 보는지 책장을 넘기며 “스파이더맨!”을 계속 외치고 엄마에게 “우리 왜 날아가요?(Why are we flying?)”라고 여러 번 묻기도 했다. 밤 비행기라 기내에 불이 꺼지자 깜짝 놀라며 “여기가 어두워졌어요!(It’s darkening here!)”라고 하고, 최근에 배운 고급(?) 단어에 애착이 가는지 시도 때도 없이 “어메이징(Amazing)!”이라고 감탄사를 냈다.

귀여운 아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그래, 가만히 있어도 정확히 들리는 건 딱 3~4살짜리가 하는 영어구나.’ 하하.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퀘벡으로 가는 기차역. 영어와 프랑스어 안내방송이 함께 나온다.

차라리 미국 역사나 문화나 정서는 몰라도 된다. 그건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살아가며 익힐 수 있다. 하지만 남들에겐 모두 들리는 온갖 말(정보)이 안 들리고, 의사소통에 조금이라도 제약이 있으면 내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며 즐겁고 떳떳하게 살 수가 없다.


당장 미국에 온 40대 이상 나이 든 연수자들만 해도(물론 학위를 따러 온 사람들은 아니다) 부족한 영어 때문에 좋은 강의를 찾아 들을 수 있는데도 가지 않고, 질문을 하지 않고, 그러다 보니 흥미를 잃어 아예 대학 자체에 발길을 끊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말이 통하는 한국 사람들하고만 지낸다.      

돌이켜보면 세계 여러나라 기자들이 모였을 때도, 한국이나 일본 기자들은 영어권 기자들보다 경력이 많고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것도 많고, 물어볼 것도 많은데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질문도 대화도 하지 않고 앉아있었던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의 결론은, 적어도 고등학교 이전에 영어권 나라에서 상당한 기간을 영어로 ‘살지’ 않으면 영어를 진짜 의미로 잘하기는 어렵다는 거다. 해외여행이나 체류 정도는 전혀 문제가 없고, 서툰 영어 실력에 맞춰주는 영어 네이티브들과 잠깐 일을 하고 어울릴 수는 있다.      


하지만 영어권 국가나 기업에서 내가 가진 능력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그에 합당한 돈을 벌기는 영 어려울 거다.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죽어라 영어학원을 다니고 영어시험에서 만점을 받아도…진정한 의미에서 ‘영어로 살고 일하는’ 상태가 되긴 어렵다는 얘기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한국에서 마찬가지인 것처럼)     


그래서, 영어공부를 하는 게 의미없단 얘기냐? 그건 절대로 아니다. 공부와 운동은 배신하지 않는다. 영어에 관심을 갖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공부하는 건 오롯이 그 사람에게 남고 자산이 된다. 다만 잠깐잠깐 쓰는 영어와 살아가는 영어(직업으로 하는 영어)는 다르다는 얘기를 하고싶은 거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내가 영어를 더 잘했더라면’ 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이면서 영어를 잘하면 직업을 구하고, 연봉을 높이는데 훨씬 더 많은 기회가 열리는 걸 절절히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오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일하는 태도와 능력이 별로인데도,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글로벌 인재’ 대우를 받으며 높은 지위와 연봉을 받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정말 책임감 있게 일하고 태도와 경험, 능력이 훌륭한데도 영어가 부족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다.

미국 연수자들 중에는 자녀가 영어때문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고민하는 부모들이 많다. 언제부터 한국인에게 영어가 '반드시 잘해야 하는' 대상이 됐을까.

영어를 잘한다고 ‘잘난 사람’은 결코 아니다. 언어는 그냥 태어나서 자란 환경에 따라 주어지는 ‘스킬(기술)’일뿐이다. 그러니 여러 사정상 어릴 때 영어권 환경에서 영어를 익히지 못했다면…,     


첫째, 한국에서 아무리 영어를 공부해도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하기 어려운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그저 받아들일 것. 절대 부끄럽거나 무시당할 일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기.(그럼 뭐 미국인은 한국말 잘합니까?!!)

미국에 와서 보니 한국인들은 영어로 질문을 받았을 때 잘 안 들리면 반사적으로 굽신굽신 ‘죄송하다(Sorry)’는 말을 너무 자주 한다. 무슨 그렇게 큰 죄를 지었다고...     


둘째, 내가 잘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에 맞는 직업과 부서와 역할을 찾아서 당당하게 일하기. 모든 분야가 거의 글로벌화 돼 가고 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면 유리한 게 많다. 하지만 스킬에 불과한 영어라는 언어로 인해 내 관심과 능력이 부당한 대접을 받아선 안 된다. 통역을 쓰든, 영어 잘하는 사람을 시키든, 나는 나만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그걸 어필하면 된다. 그럴 수 있는 부서와 분야는 얼마든지 많다.     


셋째. 한국의 위상이 중요하다. 미국에서 살아보니 한국은 이제 완전히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 한국을 잘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무시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서 정말 잘나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국인인데, 영어도 좀 할 줄 아는...그런 포지션을 가져야 한다.


다행히(?) 한국의 10~20대는 세계인이 공유하는 SNS와 넷플릭스 등 OTT 등으로 영어에 익숙하고 어느정도 말도 잘한다. 나 같은 기성세대는 우리 한국 사람과 젊은이들이 세계에서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게 지위와 판단을 동원해 십분 도와야 한다.


웬만한 번역은 인공지능(AI)이 해결하는 시대가 코 앞이다. 사교육을 많이 받아 잘 하든, 어릴 때 부모님 덕으로 외국 생활을 해서 잘 하든, 영 기회가 없어 서툴든, 영어를 신격화·특권화하지 않고 대할 수 있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


영어는 세계 수많은 언어 중 하나인 동시에 세계 공용어로 여러 곳에서 중요하게 쓰인다. 이런 사실을 덤덤하게, 객관화해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각국 정부나 기업 등 영어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도 영어 자체가 인사이트나 솔루션이 될 수 없고, 영어 잘하는 직원들이 조직의 핵심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나 최신 트렌드와 글로벌 에티켓, 문화를 배운다. 이런 연장 선상에서 영어가 요긴한 수단이란 걸 인정하면서도, 적어도 영어 하나 때문에 과도한 불이익을 받고 자존감에 상처받고 자격지심을 느끼는 시대에는 작별을 고할 때가 됐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하지 않으면 철없는 중년이 되는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