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만약 뉴욕이 별로라고 한다면 어떨까. 니가 뉴욕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어떻게 감히(?) 세계 경제의 중심지를 별로라고 하느냐…이런 반응이겠지.
뉴욕 방문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가장 최근에 간 게 2018년이니 5년 전이다.
맞다. 뉴욕은 매력적이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섹스앤더시티’를 포함해서 뉴욕을 배경으로 한 매력적인 소설·영화·드라마·노래들이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순전히 내 기준에서 뉴욕은 과거에 비해 노후한 느낌이었다. 사실 미국의 모든 대도시들이 비슷했다. 흔히 미국을 1776년에 독립선언서를 채택하고 세운 역사가 짧은 나라라고 한다. 한국은 고조선부터 반만년의 역사인데 고작 몇백 년밖에 안 됐다며.
하지만 ‘산업화·도시화’를 기준으로 보면 미국은 한국보다 훨씬 늙은 국가다. 당장 더럽기로 유명한 뉴욕 지하철만 해도 1904년부터 운행했으니 안 더러운 게 이상하다. (지상 위로 다니는 뉴욕 도시철도는 무려 1863년부터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은 말이 신생국이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산업화를 이룬 영국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세운 나라다. 당시 가장 최신 기술인 영국의 기술과 문화가 그대로 깔렸으니, 거슬러 올라가면 가장 오래된 기술과 제도, 문화적 뿌리를 기반으로 이어온 거다.
반면 한국 같은 나라는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산업화·도시화가 시작됐기 때문에, 선진국이 발명하고 개발한 기술들을 그대로 도입해 재건했다. 그 과정에서 남의 것을 뜯어서 공부하고 더 발전시킨 것도 많지만, 현대화·산업화·도시화 측면에선 신생 국가인 셈이다.
어쨌든 이번에 본 뉴욕은 5년 전과 거의 그대로였다. 노란 택시가 다니고 특유의 스카이라인을 만드는 뾰족뾰족한 빌딩들, 수많은 식당과 브랜드 간판들,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관광객들….
세월이 꽤 지났는데 거의 그대로라는 건 별로 좋아진 건 없다는 얘기도 된다. 브로드웨이 등 유명 관광지역의 보도블록은 더러웠고, 건물마다 판자와 철근을 세우고 보수공사를 하고, 거무튀튀한 비둘기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곳곳에 있는 쓰레기통들은 하나같이 너무 더러워 공포영화를 볼 때 무서운 장면을 피하듯 눈길을 주지 않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LA보다는 확실히 적었지만 여기저기 “난 심하게 부상당했어!” “난 중독됐어!” 등의 맥락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외치는 노숙자들도 적지 않다.
물가는 예상대로 천정부지였다. 코로나19 전보다 30~50%씩은 오른 것 같았다. 음식이든 물건이든 품질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평일 오후 3~4시 기준으로 가장 싼 리프트(lyft) 가격이 15~20분 거리에 60달러, 우버(Uber)나 노란 택시는 70~80달러 수준이다.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지하철을 탔는데…역시나, 노선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운동화한테 미안할 정도로 내려가는 계단부터 개찰구·승강장·열차 할 것 없이 더럽고 좁고 퀴퀴했다. 뭐, 많은 사람들이 잘도 타고 다니니 나도 그러려니 했지만 한국의 지하철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반면 ‘그래, 역시 오길 잘했어!’ 라고 미소짓게 하는 것들도 많다. 발만 딛어도 가슴이 탁 트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센트럴파크’같은 공원들과, 하루하루 그곳을 100% 활용하며 누리는 사람들, 세계적인 뮤지엄들이 대표적이다.
특히 메트로폴리탄뮤지엄(MET)이나 뉴욕현대미술관(MOMA), 자연사 박물관 등 간판 뮤지엄들은 확실히 큐레이션이나 작품유치 면에서 앞서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율 기부나 할인 대상을 줄이고 입장료를 많이 올리긴 했다)
남의 나라에서 빼앗아 왔든, 기부를 받았든, 매입을 했든 기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작품 컬렉션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늘 관람객들을 솔깃하게 할 만한 뭔가를 기획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건 부럽고 높이 평가할 만하다.
무엇보다 전시든 뮤지컬이든 발레든 유명하고 뛰어난 문화를 즐기기 위해 열정적으로 찾는 세계 각국 사람들이 ‘그래도 뉴욕은 뉴욕이다’라는 도시의 평판을 유지시켜 주는 것 같다.
관광객 중에는 예나 지금이나 뉴욕에 대한 어떤 로망이나 환상 때문인지, 아니면 미국에서 한 곳만 선택한다면 뉴욕이라는 인식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과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일까. 뉴욕은 각국 젊은 여성들이 패션을 뽐내는 무대라 할 만 하다. 거리는 물론이고 미술관만 해도 노출이 심한 의상부터 샤랄라 드레스와 헤어, 메이크업, 명품백까지…딱히 미술관과 어울린다고 할 순 없어도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다 이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더위에도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하나라도 더 보여주려고 하는 부모들의 노력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고급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먼을 비롯해 프라다·구찌·티파니·반클리프아펠 등 사치품을 파는 명품거리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몇 년 전에 비해 한산한 느낌이었다.
브랜드 간판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꽤 눈에 띄었지만 실제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뉴욕의 상징과 같은 노란 택시 역시 우버 같은 앱 기반 택시들이 활성화 돼 그런지 길가에 죽 늘어서 멈춰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센트럴파크의 명물이었던(말똥냄새를 심하게 풍겼던) 마차도 호객하는 외침만 들려올 뿐 이용자가 거의 없어 차고지(?)같은 곳에 잔뜩 쌓여있었다. 매일 공원 내 전용 도로 옆길을 걸었는데 손님을 싣고 다닌 마차는 딱 한 번 봤다.
스낵이나 음료수·핫도그·솜사탕 등을 파는 작은 푸드트럭, 뮤지엄 주위에서 포스터나 그림을 파는 상인들은 5~10년 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당시엔 꽤 활기차 보였는데 지금은 뭔가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고 메뉴나 상품이 지갑을 열 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도넛이나 베이글 같이 뉴욕을 대표하는 음식들도 한국의 디저트나 베이커리가 워낙 훌륭하고 정교해져서 그런지, 저 가격을 주고 굳이 사고싶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가격대비 그렇다는 거지 딱히 폄하하는 건 아니다.
대표적인 유명 관광지나 뮤지엄들을 제외하곤 확실히 수년 전보다 한산한 뉴욕. 아직 코로나 영향도 있을 거고, 환율이나 각국 경제,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진 영향도 있을 거다. 그 대신 개 한 마리씩을 데리고 산책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더 많아진 것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또 평화롭고 고즈넉해 보였다.
뉴욕은 여전히 대단하고 강력했지만, 내게는 이제 조금은 나이가 든 중장년의 도시 같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떠올린 서울. 뜨는 동네도 있고 지는 상권도 있고 이래저래 복잡한 문제도 많다지만…그래도 참 안전하고, 잘 정돈되고 깔끔하며, 물건과 서비스 수준이 정말(정말×100번이다) 높고, 참신한 생기로 돌아가고 있구나, 새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