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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17. 2023

안먹고 버리더라도…미국선 식품저장이 필수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또 정전이 돼서 하루종일 주변이 난리다. 어제 저녁과 밤 사이 내려친 뇌우 때문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내 아파트 월세는 한 달에 무려 200만원이다. 뉴욕이나 뉴저지, LA 등 비싸기로 악명 높은 지역도 아니고, 화장실 하나 달린 코딱지만 한 원룸인데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하필 지난해 미국에 올 때 코로나 여파 등으로 미국 렌트비가 미친 듯이 올랐고 환율까지 최악이어서 옴팡 뒤집어쓴 기분이다.


주변에 시세가 훨씬 싼 아파트도 많았지만, 당시 나의 최우선 조건은 ‘신축’이었다. 가뜩이나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혼자 살아야 하는데 잔고장이며 벌레들이며 되도록 신경 쓰지 않고 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년간 머문 아파트. 미국에서 아파트는 기본적으로 급(?)이 떨어지는 주거형태다. 그래도 3년이 안 된 신축에다 경제상황까지 더해져 엄청 비쌌다.

고장과 벌레로 인한 스트레스는 확실히 적었다. (일을 지독히도 안 하고 못하는 사악한 리징 오피스 직원들 때문에 맘고생이 엄청났지만) 하지만 이밖에도 그래도 이 비싼 아파트를 골라서 좋은 것도 있구나 싶은 건, 연수하는 1년 동안 한 번도 전기가 나가거나 물이 끊긴 적이 없었다는 거다.      


지역마다 주택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미국에선 정전과 단수가 한국보다 훨씬 일상다반사다. 처음엔 집마다 발전기를 따로 두고 21세기 선진국에서 왜 그렇게 양초를 비치해 두는지 좀 의아했다.

특히 팬트리(pantry)라고 지하실 같은 곳에 무슨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생수와 각종 통조림, 반조리 식품들을 켜켜이 쌓아두는 걸 보고 ‘미국인들은 참 식탐도 어마어마하네’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식품 저장실. [출처 언스플래쉬]


조금만 비가 많이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불어도 전기와 물이 끊겨버리기 때문에 그걸 대비하는 거였다. 심지어 평소에 우유와 오렌지주스를 안 먹는데도 습관처럼 음료수를 떨어지지 않게 조금씩 사두는 사람도 여럿 봤다. (그럼 소비기한이 지나면 어떻게 해요? 물었더니 그냥 버린다고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미국은 전역에 전력 변압기나 회로 차단기, 송전선 같은 게 수십 년이 지나 낡은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전신주 등 겉으로 노출돼 있는 전력선이 많은데 갈수록 극단적인 고온과 저온, 비바람, 천둥번개벼락, 태풍과 허리케인 같은 이상기후가 많아지면서 견디지 못하고 망가져 버리는 거다.   

비바람에 부러져 버린 나무 전신주들.

내가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도 워낙 나무가 많고 울창한데, 쭉쭉 뻗은 나무 위엔 어김없이 전력 장비들이 설치돼 있고 전선이 어지럽게 걸쳐 있는 곳이 많다.


어제도 별다른 날씨 주의보도 없었는데 저녁 해가 지기 직전에 갑자기 먹구름이 깔리더니 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저녁부터 밤까지 짧지만 세게 내린 비와 번쩍번쩍 뇌우로 아침부터 전기가 나갔다, 냉장고 음식이 다 상했다, 인터넷이 안된다, 핸드폰이 안 터진다 아우성들이었다.      

맑고 밝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꼈다. 하여튼 뭐든 드라마틱하다.

하긴 작년에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돼 허리케인 ‘이안’이 플로리다주를 완전 휩쓸어버린 뒤 노스캐롤라이나 쪽으로 북상했는데, 이미 세력이 많이 약해졌는데도 대도시의 많은 주택들이 정전과 단수를 겪었다.


그 와중에도 내 아파트는 잠깐 불이 깜빡깜빡했을 뿐 괜찮았는데, 신축 건물이라 전선이 지하에 매립돼 있고 전력 인프라들도 새것이라 견뎌낸 거 같다고 했다.


하지만 중계기 등은 다 고장을 일으켰는지 한동안 인터넷 와이파이 신호가 약하게 잡히고, 어디 갈 때마다 아예 핸드폰 통신 서비스가 먹통이 되는 등 꽤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어제 일로 지금도 핸드폰 화면에 5G가 LTE나 ‘서비스 없음’으로 바뀌고 평소보다 훨씬 신호가 약하게 표시되고 있다)       

정전의 경우 보통 5~6시간 정도면 복구가 되지만 하루 이상 걸릴 때도 있다. 이러면 정말 살아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불편하기 때문에 집집마다 거액을 들여서라도 비상전력 장치를 두는 거다.      


전신주와 큰 나무들이 넘어지고 비바람에 도로가 파이고 시설물들이 부서지면, 곳곳에서 정비 작업이 벌어진다. 주황색 형광 조끼를 입은 작업자들이 정해진 시간 동안 일하는데 이게 또 빨리빨리 되지를 않는다.


몇날며칠을 도로를 막고, ‘STOP’사인이나 ‘Detour(우회)’ 표시판을 세워놓고 공사를 하기 때문에 휴가철이나 행사기간도 아닌데 일대 교통이 마비가 되곤 한다. 물론 미국에선 아무도 ‘빨리빨리 끝내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기다리는 거다.


특히 몇달 전 여름에 접어들자 본격적인 호우, 태풍 철을 앞두고 안전 점검을 하는지, 보수를 하는지 전신주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내 아파트는 4층 꼭대기 층이라 하늘과 구름, 멀리 숲과 날아가는 새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한 번은 아침에 아무 생각 없이 헐벗은 상태로 블라인드를 걷었다가 바로 눈높이에서 전신주에 매달려 일하는 아저씨들이 수두룩해서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하하          


이제 며칠 뒤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서 직항도 없는 이곳에 평생 다시 올 가능성은 아마도 없겠지만, 그래도 정든 동네에 앞으로도 큰 자연재해의 피해가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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