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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05. 2023

약쇼핑 부러웠는데…진료에 26만원, 내시경 400만원

-40대 싱글 미국 1년 살기-

미국에선 멀쩡하게 돈 잘 벌던 사람도 한순간에 망할 수 있다.

사업이나 투자를 하지 않아도, 도박에 빠지거나 사기를 당하지 않아도 순식간에 파산하고 신용불량자가 돼 거리에 나 앉을 수 있다. 큰 병에 걸리고, 오래 아프면 그렇게 된다.      


한국도 요즘 의사 수가 부족하다, 응급실에 가도 오래 기다려야 한다 등 의료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많다. 하지만 미국에 비하면 아직까지 우리나란 좋은 나라다.     

미국 대형약국 체인점 CVS 내부 모습. 안쪽에 약사에게 상담을 받는 공간도 있다.

과장이 아니라 미국에서 심하게 아프면 정말 답이 안 나온다. ‘의사 얼굴 한 번 못 보고 죽는 사람이 많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니다.

일례로 아는 미국인이 맹장수술을 받았는데, 통증이 있어서 사진 찍고 검사받고, 수술하면서 무려 1만5000달러(약 2000만원)가 나왔다고 한다. 다행히 이 사람은 보험으로 대부분의 비용이 커버됐지만, 나 같은 연수생처럼 기본 보험만 들고 있거나 보장이 약한 보험만 가입돼 있다면 ‘고작’ 맹장수술로 통장이 거덜나는 상황이 올 수 있는 거다.     


또 한 지인은 2013년, 그러니까 무려 10년 전에 미국에서 위내시경을 3차례 받았는데 꽤 괜찮은 보험을 들고 있었음에도 당시 돈으로 3000달러가 훌쩍 넘는 비용이 청구됐다. 심지어 수면 내시경보다 싼 비수면 내시경인데도…. (내시경 같은 스캔형 검사는 보험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에서는 정말 아프면 안 된다. 실제로 연수자들 중엔 치아에 씌운 금이나 레진, 보형물이 떨어져서 불편해도 그냥 참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웬만큼 열이 나고 감기가 심하게 걸려도, 허리가 삐끗해 아파도, 넘어져 피부가 조금 찢기고 피가나도…그냥 약국 약으로 해결하며 참는다.      


문제는 애들이 아플 때다. 나야 애가 없지만 미국에서 한인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온라인 단체방을 통해 급히 도움을 수소문하는 경우도 대부분 갑자기 아이가 아프거나 다칠 때다.

돈도 돈이지만 당장 달려가서 의사를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맞다, 미국에선 병원을 가고 싶다고 가는 게 아니고, 의사에게 (아무리 단순해도) 진료를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도대체 왜?     


이건 미국 특유의 의료시스템 때문이다. 캐나다도 거의 비슷하다고 들었다.

미국은 1차로 패밀리 닥터, 그러니까 주치의를 선정하게 돼 있다. 한국식으로는 가정의학과 같은 곳인데 의대를 졸업해 의사 자격증이 있지만 아픈 증상들을 말 그대로 전반적으로 봐주는 의사들이다.

여기서 처방대로 약을 받고 치료를 하다가 그래도 안 될 거 같으면, 소견서나 추천서를 써 주는데, 그걸 받아서 전문의들이 있는, 2차 의료시설로 갈 수 있다.

한 마디로 1차 의료시설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전문의에게 갈 수 없게 돼 있는 거다. (이게 가능한 병원이나 아주 비싼 보험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또 아무리 소견서를 받았다고 해도 바로 전문의가 있는 병원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병원에 전화해서 ▶새 환자를 받는지 물어보고 ▶ 받는다고 하면 환자등록을 어떻게 하는지(이메일로 해라, 홈페이지에서 해라, 전화로 하면된다 등 다 다르다) 알아본 뒤 ▶등록을 마치고 나서야 검사 날짜를 잡는데…길게는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당일에 갈 수 있고, 늦어도 며칠 내로 예약이 잡히는 한국 병원들을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럼 급할 경우면 어떡하나.

첫째, 숨을 못 쉰 다거나 피가 철철 나고 부상이 너무 심각하다면 당연히 응급실(ER)을 간다.

둘째, 열이 오르는 등 생명에 지장이 없는 경우라면 대부분 ‘어전트 케어(Urgent Care)’를 방문한다. 이 시설은 지역마다 꽤 여러 개가 있는데, 사실 엄밀히 말해 병원이라기보다 클리닉 정도의 시설이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채플힐에 있는 한 어전트 케어시설.

의사없이 간호사나 의료 종사자 정도만 있는 곳도 많은데, 실제 목캔디 같은 걸 주거나 ‘가습기를 좀 틀어보세요’ 등 별다른 처방을 해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어전트 케어는 의료시설이 아니라 urgent란 이름대로 엄연히 ‘응급실’로 분류되기 때문에 보험이 적용되지 않거나, 보험 보장 횟수가 제한된다.


아는 후배도 감기가 심해 어전트 케어에 갔다가 항생제 한 알 못 받고(물론 한국의 항생제 과다처방은 문제가 있다) 1회 방문에 199달러(약 26만원)을 내고 돌아왔다. 그래서 어전트 케어를 경험한 사람 중엔 ‘가봤자 아무 소용없다’ ‘괜히 돈만 버렸다’ ‘내가 생강차를 끓여먹을 걸 그랬다’ 등의 후회(?)도 많이 한다.      

나도 물이 바뀌고 공기가 바뀌어 그런지, 미국 연수 초반엔 감기를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앓았다. 다행히 아주 심하지는 않아서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일주일 정도면 낫곤 했다.

허리 아픈 것도 유튜브에서 한국의 유명한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 알려 주는 스트레칭 영상을 보고 매일 따라 하고 걸으며 다스렸다.

한 번은 높은 곳에 붙은 벌레(노린재였다)를 잡겠다고 철재 간이 의자에 올라가 방방 뛰다가 떨어져서 왼쪽 종아리가 몇 센티 찢어졌는데, 알코올로 소독하고 한국서 가져온 후시딘을 듬뿍 바른 뒤 붕대로 칭칭 매고 그냥 다녔다.

     

미국의 복잡하고 불편한 의료 시스템을 간접 경험하고 나니, 이제야 왜 그렇게 미국 영양제 종류가 많은지, 왜 TV만 틀면 약 광고가 나오는지, 사방에 CVS나 월그린 같은 대형 약국들이 왜 그리 많고, 오만가지 약을 처방도 없이 쉽게 살 수 있는지 이해가 됐다. 


잘 몰랐을 때는 감기약은 물론, 멜라토닌 같은 수면유도제와 각종 알레르기 약까지 음식 사듯 쉽게 살 수 있는 미국이 부러웠는데, 이제는 꼭 그럴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약국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약들은 매우 순한 축에 드는 약들이고, 그런 만큼 심각한 증상엔 큰 효과가 없다.     

미국 대형약국 체인점 CVS에 즐비하게 진열된 약. 식품처럼 1+1 행사나 세일도 많이 한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

이 말은 어느 나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미국에선 더더욱 그렇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나라다. 이미 아픈 채로 오래 사는 ‘유병장수’의 시대다. 중장년 이후의 삶에 있어서는 어쩌면 교육보다, 레저보다, 쇼핑시설보다 의료시설과 서비스가 훨씬 더 절실한 부분이 될 거다.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하면 국민 개인에겐 최소한의 부담만 지우면서 지원할지가 앞으로 정부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것 같다.     


할 말이 마땅치 않아 하는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정말 모두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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