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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역 Jun 25. 2024

창 밖을 바라보며

아침에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베란다 밖을 내다보고 앉아 있으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하늘로 치솟은 아파트 숲과 절반으로 나누어진 파란 하늘이 바라보인다.


우리의 삶은 점점 파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잃어가는 것 같다. 시야를 가로막은 아파트 회색벽을 바라보는 것과 뻥 뚫린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것과 무슨 차이가 날까.

 

아마도 다른 것은 차치하고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콘크리트 회색을 바라보면 꿈보다 남들과 삶의 수준이나 부에 대한 경제적 가치 등 현실적인 생각만 떠오르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 무한한 꿈을 꾸게 된다.


요즘 도시나 농촌이나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아파트가 집이 아닌 산이 되어간다. 마치 높은 산의 줄기처럼 아파트가 들판을 가로막고 산처럼 숲을 이루어 사람들의 시선과 경관을 차단한다.


프랑스에서 한국 사회를 연구하는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한국의  아파트 성장과정부터 개발의 역사, 아파트 유형학, 단지 양산의 특징 등과 함께 아파트 단지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문제점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쓴 『아파트 공화국』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실패한 주거모델인 '대단지 아파트'가 어떻게 한국을 유혹할 수 있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했는데 그의 말마따나 우리나라를 아파트 공화국으로 표현한 것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왜 우리는 하늘로 치솟은 바벨탑 놀이에 목을 매듯이 살아가는 것일까. 오늘의 세대가 내일을 생각히지 않고 무지막지하게 바벨탑을 세운다면 나중에 미래 세대가 오늘의 세대를 바라보며 어떻게 생각할까.


언젠가 방배동에 사는 막내에게 먹을거리를 갖다 주려고 장지동에서 양재대로를 이용해서 가는데 양재대로 좌측은 산이고 우측은 아파트가 성벽을 이루어 마치 아파트가 산처럼 웅장한 벽처럼 다가왔다.


사람들은 왜 하늘로 치솟는 아파트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정답을 모르겠다. 아파트보다 단독과 같은 주택을 지어 공원과 함께 조성하면 멋진 도시나 농촌이 될 텐데.


비가 오고 나자 더위가 한풀 꺾였다. 그날그날의 날씨는 자연의 변화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침부터 날이 찌는 듯이 덥더니 한밤중에 비가 오고 나자 언제 그러했느냐는 듯이 서늘한 기운이 감지된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주기로 하루의 일상이 반복된다. 단지 그 반복에는 날씨 변화에 따른 사람의 마음과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만 달라질 뿐이다.


아침부터 어디선가 까마귀가 "까악 까악" 거리며 울어댄다. 까마귀 울음소리에는 어둡고 침침하고 암울한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까마귀 울음소리를 죽음이나 안 좋은 소식을 듣는 나쁜 의미로 받아들인다.


까마귀는 그저 하늘을 날아다니며 자기 짝을 찾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들의 울음소리를 좋지 않은 것에다 끌어다 써서 까마귀는 까치보다 나쁜 이미지를 갖는 새로 간주해 왔다.


'반포보은'이란 까마귀가 어릴 때는 어미새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먹으며 자라다가 자라서는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줌으로써 키워 준 은혜에 보답한다고 의미다.


까마귀도 이미지를 변화시키면 좋은 새가 되는데 그놈의 날개가 검은색이라는 것과 울음소리가 사람의 마음에 그악스럽게 들려서 좋은 새이면서도 나쁜 이미지의 인상을 벗어날 수가 없다.


아침의 날씨가 맑다가도 까마귀가 '까악 까악' 울어대니 구름이 곧 몰려올 것만 같다. 마치 까마귀가 날씨까지 변화시킬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요즈음 며칠 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빈약한 머리에 빈약한 생각만 하다 보니 마땅하게 소재 삼아 쓸만한 것도 없어서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며칠간 푹 쉬었다.


며칠간 책을 읽으면서 지내다 보니 책을 읽으며 지내는 생활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사무실 옆에 시립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어 책을 빌려 읽기도 수월해서 도서관에 자주 책을 빌리러 간다.


지난 며칠 동안 글을 쓰지 않아도 그럭저럭 생활이 가능한 것을 보니 글쓰기에 매달려 사는 것도 좋은 것 같지는 않다. 글을 쓰던 쓰지 않던 생활이야 똑같지만 나는 누구를 위해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일까.            


미국의 수필가 J.B. 프리스틀리는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은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라며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말했다.


그간 프리스틸리가 말한 대로 글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글쓰기를 하지 않은 것인가 못한 것인가. 글을 쓰려면 이유 없이 무조건 쓰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아도 그냥 쓰라는 수필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이제야 내가 글을 쓰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글쓰기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더라도 무조건 쓰고 보자. 그것이 시야를 가로막은 아파트 숲 너머에서 펼쳐지는 파란 꿈을 찾아가는 희망이자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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