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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택의 쿼카 Apr 13. 2023

#4. 저도 아쉬울 것 하나 없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사서함으로..."


과장님, 기린과장님 전화 안 받으시는데요. 회의 중 이신 것 같은데 쫌이따 제가 다시 한번..."

"전화 안 받는다고? 내가 해볼게. 어, 과장님 통화 괜찮으세요? 다름이 아니라..."


이럴 수가. 내 전화는 4번이나 거절하더니, 다른 팀원이 전화하니까 바로 받다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면 모르겠는데 계속 이런 식이다 보니 기가 찼다. 따져서 묻고 싶은 한 가지.


"왜 제 전화만 안 받으세요?"




입사한 지 5개월. 누구나 순진함과 어리바리를 향수처럼 풍기고 다니는 시기. "사회초년생은 성실하기만 하면 눈에 띈다"라는 말만 명심하며 지내면 되리라 생각했다. 서슬 퍼렇게 독해지면서 깨달은 한 가지. 성실하기만 하면 안 된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필요한 사람이 되어, 나의 전화는 무시받는 전화에서 받아야 할 전화가 되어야 함을. 그러기 위해선 우선 공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강이라도 다 알아야 한다. 알지 못하면 대화를 할 수 없고, 필요한 사람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A 설비는 이렇고, 라인 타고 가서 적재구역에서 로봇 이거 키면 자, 이렇게 되면 블라블라..” 그들만의 설비 용어에다 줄임말까지 써서 머리털이 다 뽑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냥 말해도 못 알아듣겠는데, 지역 공장에서는 사투리까지 얹혀 도저히 알아먹지를 못하는 내 속에서는 분통이 터졌다. 나도 얼른 배우고 싶은데.... 용어라도 빨리 알아들어야 그나마 혼이 덜 날 수 있을 텐데... 마음이 조급해질수록 귀가 트이는 속도는 더뎌졌다. 이래선 안 되었다.



여느 날과 똑같이 버스 퇴근길. 보라색 빛바랜 버스 커튼을 닫아놓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커튼을 제쳐 창문을 보니 밖으로 드넓게 펼쳐진 밭 속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겐 전략이라는 게 없었다’라는 문장 하나가 머릿속에 스쳤다.



왜,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어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재즈바를 경영하던 그가 야구장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면서 야구를 보다가 젊은 외야수가 안타를 쳐 1루 베이스를 돌아서 여유 있게 2루를 밟은 순간. ‘소설을 써야겠다’라고 생각이 들어 소설가가 된 그였다. 물론 세계적인 작가로의 인생의 방향을 튼 그런 마법적인 순간까지는 아니었지만, 참 신비로운 순간이었다. 전략이 없다는 것만 깨우치는 것에서 끝났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겠지만, 다행히도 집에 도착해 굴러다니는 메모장을 집었다. <전략>이라고만 썼다가, 전략 앞에 <생존>을 붙였다. 그날, 공장의 기역자도 모르던 사회초년생의 <생존 전략기>가 완성되었다.






7개의 전략 중 첫 번째 전략 : 그나마 가장 온순해 보이는 사람에게 많이 물어본다. (여기서 포인트. 빈 손 말고 간식이라도 챙겨가서 물어봐야 한다)



전략 1을 수행하면서 생전 별로 관심에도 없던 ‘사람 관상 보는 법’을 네이버 초록창에 쳐보기도 했다. 물론 인상은 온순해 보여 다가가서 질문했지만, 대화해 보니 날카로운 송곳니 같던 분들도 더럿 있었지만. 여럿 찾아서 문을 두드려보니, 나에게 마음을 열어주는 분들도 세 분 정도 있었다. 그들과는 친해져 몇 년 뒤 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차장님,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차장님한테 계속 질문하러 갔었을 때 기억나세요? 차장님 착해 보이셔서 일부러 차장님 찍어서 여쭤본 거예요.”

“알지. 나 착해 보여? 나 악질처럼 생기지 않았나? (웃음) 그때 너 노트 들고 나한테 뭐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서 있는데 노트가 바들바들 떨리더라고. 안쓰럽기도 하고 뭐 내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랬지.”



전략 1의 주 목적인 <많이 알기>는 달성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선배들과 인연 맺기>가 운 좋게도 결과로 뒤따라왔다.




나의 전화를 4번이나 거절하던 과장님이 내 전화를 받기까지는 반년이 더 걸렸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전화하기>까지는 그로부터 반년이 더 걸렸다.

하루는 화장실을 가느라 사무실에 핸드폰을 두고가 그의 전화를 못 받은 적이 있었다.


“왜 전화를 안 받은 거여? 바쁜가?”

“아니요. 죄송합니다, 화장실 다녀왔습니다. 어떤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아니 그냥 내가 그저께 물어본 거 어떻게 되었나 싶어서... 원래 아쉬운 사람이 전화하는 거 아니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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