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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앙카 May 17. 2023

내가 말하고 있잖아-정용준 장편소설을 읽고

다들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야.

 독서모임에서 선정된 첫 소설책이다. 물을 많이 섞어 옅은 파란색이 된 배경 위에 해석하기 어려운 그림인지 낙서인지 알 수 없는 겉표지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주인공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상대가 자꾸만 말을 끊는다는 내용인가?라는 생각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두 번째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는데 긴 한숨이 내쉬어졌다. 마음, 상처, 통증, 미움, 괴롭힘, 쓰레기통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자 가볍게 손에 쥐었던 책이 어쩐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 나는 잘해 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 속지 않겠다. 기억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내 편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바보 멍청이 이 똥 같은 놈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과거의 난 그랬다. 잘해 주기만 하면 돌멩이도 사랑하는 바보였지. 하지만 열네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 정용준 장편소설 (p.9)


 열네 살 소년은 아주 많이 화가 나 있었다. 그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할 말이 넘쳐났다. 하지만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노력하려고 할수록 더 엉망이 된다.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고 결심하고 잘해 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가슴이 아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아왔길래.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누구나 존재한다. 내가 과거에 미워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나에게 차갑게 굴었던 사람, 모진 언어로 내 자존심을 긁었던 사람, 말조차 섞는 것도 불편했던 사람을 하나 둘 떠올렸다. 몹시 미워했었고 나만의 언어로 실컷 욕을 퍼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중학교 때 주인공처럼 미운 사람을 욕으로 빼곡히 채웠던 일기장이 있었다. 그런데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과연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면, 얼마나 깊은 상처였을까? 복수하고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정신적, 신체적 폭력이 가해졌던 것일까. 그래서 슬프고 미안했다. 화로 가득 차 있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생생히 들렸다.


 



 지하철에서 스피치 하는 장면이 나온다. 소년은 말 더듬증을 고쳐보고자 더듬더듬 연설하는 끔찍한 장면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의 비웃는 표정과 불쌍하게 바라보는 표정까지 생각이 난다는 말에 나는 생각이 났다.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다니고 출퇴근을 하던 시절 웅변학원인지, 스피치 학원인지 용기 내서 나왔다며 커다란 스케치북에 쓴 글씨를 들고 뭐라고 뭐라고 소리 내어 말하는 모습이다. 그때는 그런 사람들의 어눌한 말과 표정, 차림새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인상까지 찌푸리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어서 이 시끄러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해 말을 하고 있었고 애를 쓰고 있었을 그때의 그 사람을 나 역시 외면했다. 스쳐 지나간 과거의 한 장면이 연설이 끝난 뒤 눈물을 흘리며 무작정 달리는 소년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나 또한 상처를 입힌 이들 중 하나였다.


 엄마의 애인이 소년이 쓴 일기장을 발견했고 소년에게 또다시 모진 말을 퍼붓는다. 결국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지? 마음 졸이며 읽었다. 소년의 옆을 지켜줬던 언어 교정원 사람들과 소년의 마음 치유과정을 그린 이 이야기는 흔하지 않은 소재라고 여길 수 있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겪는 평범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마음이 앞서고 하고싶은 말이 많아질 때 말을 더듬는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정도 말더듬이들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소년은 말을 더듬었지만 어떤 사람은 먹고 싶지만 삼킬 수 없어서 먹지 못하기도 한다. 정말 조금만 먹어봐. 할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꼭꼭 씹어서.. 천천히. 하지만 퉤퉤. 뱉어버린다. 삼키고 싶지만 도저히 삼킬 수 없다. 왜 못 삼키냐고 화를 내지 말았어야 했다. 왜 말이 안 나오냐고 화를 내지 말고 안아 주어야 한다. 다 노력하고 있는 거다. 누구보다 잘 해내려고 애쓰고 있는 거다.  


 책을 다 읽고 겉표지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여기저기 동그라미(0), 수많은 엑스(x), 거꾸로 쓴 숫자들, 코끼로 코에 달린 뿔, 외계인, 뾰족한 화살과 뾰족한 우주선..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르다. 신기하고 이상한 모습들. 우리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모두 다 같을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하고 다채로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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